우리는 보통 스트레스를 ‘풀려고’ 극장을 찾지만, 때론 스트레스를 ‘받으려’ 영화를 보기도 한다. 벼랑 끝으로 몰리며 엄청난 심적 억압을 받는 영화 주인공들의 불쌍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내 처지가 그래도 저이보단 나아!’라는 상대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 지금부터 최근 개봉했거나 곧 개봉할 영화 중 그 주인공이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는 갑갑한 영화 ‘베스트 10’을 소개한다.
[10위] 방가방가=취업 문턱에서 늘 좌절하던 까무잡잡한 청년(김인권)이 자신을 부탄에서 온 외국인근로자 ‘방가’로 속여 취업하지만 신분이 들통날까봐 노심초사한다는 얘기. 한국인임을 밝히자니 해고가 두렵고, 외국인근로자로 살아가자니 사회적 편견이 무섭다. 아, 이런 난감한 상황을 갖고 ‘진퇴양난’이라 하던가, 아님 ‘방귀와 응가 사이’라 하던가.
[9위] 친구와 연인 사이=전 여자친구를 바람둥이 아버지에게 빼앗긴 후 사랑을 믿지 않던 애덤(애슈턴 커처)은 미모의 병원 레지던트 에마(내털리 포트먼)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이게 웬일?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에마가 “낮이나 밤이나 필요할 땐 언제나 만나 섹스를 즐기되 절대로 사랑은 하지 말자”고 선언하면서 애덤이 번뇌에 빠진단 얘기. 아, 걱정도 팔자다. 내가 보기엔 그저 곗돈 탄 놈에 불과하거늘.
[8위] 메가 마인드=슈퍼 히어로인 ‘메트로맨’과 대적해 늘 패배만 하던 악당 ‘메가 마인드’는 어느 날 우연찮게 자기 손으로 메트로맨을 제거하자 예기치 않던 실의에 빠진다. “착한 놈이 죽었으니 이젠 ‘악당질’ 할 맛이 안 난다”면서…. 공부는 엄마가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다그칠 때 안 하는 게 정말 짜릿하단 얘기?
[7위]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문호 톨스토이(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자신의 ‘톨스토이즘’을 실현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 하지만 아내 소피아(헬렌 미렌)는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며 극심한 히스테리를 부린다. 결국 아내를 피해 야반도주하는 톨스토이…. 소크라테스도 그랬거늘, 위인을 만드는 건 악처?
[6위] 아메리칸=노련한 암살요원 잭(조지 클루니)은 임무를 마치고 사진작가로 위장해 이탈리아로 숨어들지만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누군가의 발길을 눈치 채면서 불면의 밤을 보낸다는 얘기. 남 죽여 놓고 자긴 살려고 하면 되나…. 킬러에겐 노후가 없다!
[5위] 황해=중국 옌볜에서 택시운전사로 사는 구남(하정우). 노름빚에 쪼들린 그는 한국으로 가서 감감무소식인 아내도 찾고 큰돈도 벌기 위해 살인을 청부받고 서울 강남으로 찾아온다. 목표물을 눈앞에서 노리는 순간, 아뿔싸.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목표물을 먼저 제거해버리는 게 아닌가! 아, 강호는 넓다. 뛰는 살인자 위에 나는 살인자 있거늘….
[4위] 블랙스완=유명 발레단의 주역으로 일약 발탁된 니나(내털리 포트먼). ‘백조의 호수’ 첫 공연을 앞두고 ‘완벽한 공연’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의 몸이 흑조로 변해간다는 착란에 빠진다…. 늘 그렇듯,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장본인은 늘 자기 자신.
[3위] 127시간=혈혈단신 산악 등반에 나선 에런(제임스 프랭코)은 떨어진 바위에 팔이 짓눌린 채 골짜기에 고립된다. 그는 로프, 칼, 물 한 병에 의지에 127시간의 사투를 벌인다. 점차 의식이 혼미해 가는 그에게는 팔을 잘라내는 방법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데…. 불쌍하긴 하지만 알고 보면 자초한 불행. 누가 혼자 가래?
[2위] 윈터스 본=두메산골에서 두 동생과 치매에 이른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17세 소녀 돌리(제니퍼 로렌스). 마약판매혐의로 실형선고를 앞둔 아버지는 집을 담보로 보석금을 내고 감옥에서 나온 뒤 돌연 종적을 감춘다. 집을 내주지 않기 위해선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 돌리.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살해돼 어딘가에 유기됐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된 그는 아버지의 시체를 찾기 위해 겨울 산골을 애타게 헤맨다. 아, ‘설상가상’의 진수를 보여주는, 보고 나면 일주일 동안 마음이 찜찜한 영화.
[1위] 대지진=1976년 중국 탕산(唐山) 대지진. 아비규환 속에서 어머니는 자녀인 7세 쌍둥이 ‘팡떵’과 ‘팡다’가 모두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추가 붕괴가 임박해 어머니는 둘 중 단 한 명만 살려낼 수 있다. 과연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가! 어머니는 결국 아들인 ‘팡다’를 선택해 살려내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 ‘팡떵’이 구조대에 의해 추가 구조돼 십수 년 뒤 어머니를 찾아오는데…. 아, 마음 찜찜한 영화의 고전 ‘엄마 없는 하늘 아래’보다 500배쯤 더 찜찜한 영화. 보고 나면 보름간은 족히 마음이 무겁고 살맛이 안 난다. 우리 어머니들은 그 자체로 속절없는 원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가엾은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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