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쁘고 귀엽다. 남부러울 것 없는 넉넉한 환경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해 구김 없이 맑고 깨끗하다.
하지만 그녀는 철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부유한 부모 덕분에 세상 어려운 줄 모르는 철부지처럼 보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물론, 동료의 일까지 깔끔하게 처리할 정도로 책임감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 직장 후배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선배이기도 하다. 외모에 능력, 성격, 부모의 재력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엄친딸'이다.
좋은 기획 아이디어가 촘촘하게 적힌 다이어리가 보여주듯, 그녀는 좋은 책 만들기와 출판사 경영 외에 다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똑똑하고 야무진 전문가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180도로 변신한다.
헐렁한 티셔츠에 늘어진 트레이닝팬츠 차림으로 부모에게 애교를 부리고, 나이 어린 손위 삼촌과의 장난을 즐기는 빈틈 많고 허술한 이미지의 소녀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현대 여성의 이미지와 전형적인 부잣집 딸의 이미지가 겹쳐져 사랑스러운 매력을 발산하는 그녀. '반짝 반짝 빛나는'의 한정원(김현주 분)이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다혈질로 자존심과 승부 근성이 강한 것 같지만, 실은 그녀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눈물부터 흘리는 여린 심성으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갓난아기를 맡아 키우겠다고 나설 정도로 모성 본능이 충만한 여자이기도 하다.
나이 어린 손위 삼촌 공부를 도와주는 과외 선생님의 갓난아기에게 과도할 정도로 애정 공세를 퍼붓는 그녀에게 빨리 시집이나 가라는 엄마의 타박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사랑과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
결혼 적령기에도 불구하고 사랑보다 일을 선택하면서 자기 세계에 빠져 살고 있지만, 엄마의 강권 때문에 그녀의 주말은 대부분 맞선으로 채워진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녀는 맞선 상대에게 차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멀쩡한 머리와 옷차림을 헝클어뜨리는 것은 기본이고 막말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별명이 "고등학교 때는 한 절벽, 대학교 때는 한 평면, 지금은 한 뽕"이라고 말하며 맞선 상대를 기함하게 만드는 것은 결혼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그녀의 전략일 뿐이다. 그래도 밉지 않다.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럽다.
경제적 여유가 아니라, 그것에서 비롯한 정신적 여유로 반짝 반짝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 목표는 존경하는 아버지의 출판 사업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몇 살 터울 지는 오빠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신은 그녀의 편이었다.
출판사 전무 직함을 달고 있는 오빠는 기획 팀장에 불과한 그녀와 달리 오로지 아버지의 유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 있는 오빠 덕분에 출판 경영이라는 그녀의 인생 항로는 순항중이다.
그런데 순풍에 돛단 듯했던 그녀의 인생에 갑자기 거센 풍랑이 몰아치면서 암초에 부딪쳐 좌초할 위기에 처했다. 시작은 별 것이 아니었다. 사법시험 합격자라는 타이틀에 혹한 엄마의 강요로 나간 맞선 자리에서 졸지에 임자 있는 남자를 가로 채는 몰상식한 여자로 낙인찍히면서부터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맞선 남자에게 딱지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한 여자가 맞선 남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토마토 주스로 자학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 그녀가 삶의 방향타를 잃어버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결혼할 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을 찾아 맞선 자리에 나온 뻔뻔한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어이없고 황당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토마토를 뒤집어 쓴 여자의 심정으로 맞선 남자의 야비함을 질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써 도와준다고 했는데 남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는 타박이 그녀의 인생에 암운이 드리워진 전조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신간 홍보 때문에 들른 대형서점에서 다시 만난 그 여자에게서 음울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저 배신당한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출판사 팀장과 서점 직원의 관계가 있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여자가 자꾸 그녀의 삶에 끼어들었다.
생년월일이 똑같은 동갑내기라는 사실에 재미있는 인연이라 생각하고 통성명을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자신을 쳐다보는 그 여자의 눈길에 독기가 서려 있는 불쾌한 느낌만은 지우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그토록 깐깐한 편집장 송승준(김석훈 분)이 그 여자에게 친절한 것도 마뜩치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그 여자 황금란(이유리 분)은 그렇게 그녀의 삶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 사랑스런 눈길로 자신을 챙겨주던 엄마가 언제부터인가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 그녀는 가슴에 담아두자니 불쾌하고 표현하자니 치졸한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 한다.
급기야 엄마가 서점 앞에서 황금란을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이상한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황금란과의 술자리를 만들지만, 뒤늦게 나타난 편집장이 황금란만 챙기는 것을 보면서 또 다시 불길한 질투심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렇게 그녀의 일상은 실체를 알 수 없는 황금란에 의해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다.
"네가 친 딸이 아니란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는 한정원의 삶을 뿌리째 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언제나 맑은 하늘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모님의 친 딸이 아니라니, 산부인과의 실수로 신생아 바뀌었다니 이 무슨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소리란 말인가?
어머니가 자기를 임신했을 때 먹었던 '오이소박이'가 입에 맞지 않는 것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실은 어머니와 자신의 피가 달라 그런 것이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지지리 궁상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친부모라니, 30여 년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도박중독으로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아버지와 고시생을 상대로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를 부정하고 그냥 예전처럼 살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가난한 부모 대신 부자 부모를 보내달라고 기원하는 철부지 어린 소녀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그녀를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내놓고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가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을 어느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식에게 기적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처지가 서러워서 "엄마라는 것이, 널 낳은 것이 미안하다"며 흐느끼는 친어머니의 1회용 믹스 커피를 원두커피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거절하며 강짜를 부리다가 이내 후회하는 그녀는 철부지 불효녀가 아니라 부모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자식들의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버릇없고 철없는 낯선 딸을 위해 어머니가 커피 전문점에서 사온 커피라는 말에 빈 컵을 버리지 못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녀를 싸가지 없는 딸이라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3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사랑하고 존경했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한정원을 철없고 이기적이라 비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속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속물일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의 손가락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부자 부모와 가난한 부모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한정원의 얄궂은 운명은 핏줄을 핑계로 감춰둔 가족 사이의 경제 논리를 헤집으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성찰하게 만든다.
한정원에게서 돈 때문이라면 부모와의 인연도 끊을 수 있다는 풍토가 확산되는 천박한 현실에 찌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래서이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지리 궁상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친부모이니 찾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기가 막힌 상황을 어느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덕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는 필요 없다. 자본이 핏줄보다 강한 자본주의의 그악스러움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만들었지만, 우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한정원을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지지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핏줄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실은 자본을 우위에 두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 가족이 처한 현실은 아닐까?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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