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옥보단 3D’를 본 어느 30대 주부의 분노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24일 03시 00분


수컷들의 性 판타지… ‘대물지상주의’ 역겨움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로 점철된 ‘옥보단 3D’에서 극중 남자 주인공 미양생은 성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사 하늘 제공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로 점철된 ‘옥보단 3D’에서 극중 남자 주인공 미양생은 성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사 하늘 제공
30대 후반의 주부 P 씨는 일요일이던 15일 저녁 모처럼 남편의 팔짱을 끼고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았다. P 씨 부부가 본 영화는 ‘옥보단 3D’. 과거 1990년대 학창시절 서클 선배오빠와 서울 안암동의 칸막이로 구성된 허름한 비디오방에서 옥보단 오리지널 버전을 함께 보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 P 씨는, 야하면서도 해학적이었던 옥보단이 첨단 입체버전으론 어떻게 재탄생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부부가 2만6000원의 관람료를 지불한 뒤 다소 상기된 얼굴로 3D 전용 안경을 낀 P 씨. 영화가 시작된 지 딱 15분 만에 P 씨의 기대는 펄펄 끓는 증오로 바뀌었다. 영화엔 스토리텔링이란 게 없어 보였다. 오로지 수없이 등장하는 이름 모를 여성들의 출렁이는 가슴들이 ‘주인공’ 자체였다. 가슴, 가슴, 가슴, 가슴, 또 가슴…. 평생 2초 이상 섹스를 해본 적 없는, 코 크고 느끼하게 생긴 남자 주인공이 성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수탕나귀의 성기를 이식받는다는 내용. ‘대물’로 변신한 그는 수많은 여성을 성의 노예로 삼다가 결국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는 참회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물론 남자들의 ‘대물 지상주의’와 ‘정력 숭배’를 P 씨가 모르는 바 아니다. P 씨가 참지 못했던 건 영화를 시종 지배하고 있는 수컷들의 어리석은 성적 판타지였다. 영화 속 여성들에겐 도대체 인격이란 게, 심지어는 뇌란 게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처음엔 “안 돼요!” 하다가도 수컷들이 일단 작업(?)에 돌입하면 “노(No)”는 어느새 “예스(Yes)”로 변하며 자지러졌다. 기다란 성기를 왼쪽 허벅지에 칭칭 감은 남자 주인공은 “한 번에 10명과도 할 수 있지요. 으핫핫하” 하며 성기를 장검처럼 휘둘러대고, 뭇 여성들은 영혼이라도 내줄 것처럼 벌거벗고 그를 졸졸 쫓아다녔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 남자에게 처절하게 버림받았던 조강지처가 이 남자와 재회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건 수컷들만의 완벽한 판타지였다. 섹스를 ‘소통’으로 보기는커녕 “너를 반드시 ‘뿅’ 가게 만들고 말 테다”라는, 일종의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여기는 남자들이 P 씨는 역겹다 못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옆을 쳐다본 P 씨는 꿀꺽 침을 삼키며 자꾸만 다리를 이리 꼬았다 저리 꼬았다 하는 남편이 저질스럽게 인식되었다.

영화가 끝났다. P 씨는 3D 전용 안경을 부서져라 내던지며 상영관을 나섰다. 1만 원이 넘는 관람료가 피처럼 아깝게 느껴졌다. 왠지 남편도 영화 속 놈들이나 진배없다는 생각에 남편과 잠자리를 하고픈 마음도 먼지처럼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을 편 P 씨는 1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로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던 62세 남자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미국 뉴욕의 한 호텔에서 여종업원을 성폭행하려 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P 씨의 내면은 암담했다. 아, 남자라는 것들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배웠든 안 배웠든, 젊었든 늙었든, 좌파든 우파든 하나같이 들이대기만 하는 한심한 족속일 뿐이란 말인가!

P 씨는 갑자기 과거 비디오방에서 옥보단 오리지널 버전을 함께 보면서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던 서클 오빠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땐 멋지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 남자 역시 저질이었다는 사실을 P 씨는 18년 만에 알게 되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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