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연애하는 드라마’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김희선 주연의 ‘미스터 큐’(1998년)와 ‘토마토’(1999년)가 대표적이다. 주인공은 밝고 예쁘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순진하고 착하기까지 한 이 주인공은 유능하고 예쁘지만 심술궂은 여자 상사나 동료와 연적이 된다. 못된 연적이 여주인공에게 심술을 부릴 때마다 남자 주인공이 짠 하고 나타나 구해준다는 설정이다. 2001년 방송됐던 ‘호텔리어’도 상투적인 선악구도나 캐릭터 설정에서는 벗어났지만 ‘직장 로맨스물’의 범주에 속한다.
월화 드라마 시장에서 경쟁 중인 KBS2 ‘동안미녀’와 MBC ‘미스 리플리’를 보면 기시감이 든다. ‘동안미녀’는 패션회사, ‘미스 리플리’는 호텔이 배경인데 이는 직장 로맨스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업종이다. 두 드라마 모두 직장 동료와 선후배 간에 벌어지는 사랑싸움이 줄거리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예전의 직장 로맨스물과는 큰 차이가 있다. 착하고 순진했던 여주인공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로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그녀들이 예쁜 입으로 거짓말하는 이유는 단 하나, 취업 때문이다.
고졸 학력이라는 이유로 면접시험마다 떨어지고 면접관에게 성추행까지 당한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이다해)는 엉겁결에 도쿄대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34세인 ‘동안미녀’의 이소영(장나라)은 동생 신분증을 도용해 나이를 25세로 속인다. 거짓말한 보람은 있었다. 장미리는 어릴 적 보육원에서 만난 친구 문희주(강혜정)의 도쿄대 졸업장을 위조해 취업에 성공하고, 이소영도 “성형한 것 아니냐”는 오해는 받지만 일단 합격이다.
이소영과 장미리는 착하기만 했던 ‘미스터 큐’나 ‘토마토’의 여주인공과 달리 악착같고 독하며 전략적이다. ‘하드코어’에 가까운 직장생활을 견디려면 어쩔 수 없다. 막내 디자이너 이소영은 막말은 기본에다 양 뺨을 돌려가며 때리고는 미안하다 말도 않는 선배까지 뒀다. 자신을 질투하는 팀장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없는 사람 취급한다. 이소영은 참고 또 참는다. ‘디자이너가 돼 내 옷을 매장에 걸겠다’는 꿈 하나로 끝까지 버틴다.
장미리도 못지않다. 방한한 일본 총리 딸이 호텔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위기에 처하자 장미리는 그녀가 갈 만한 곳을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다닌다.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실은 나도 동성애자”라는 거짓말까지 해서 결국 그녀를 찾아오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앞뒤 가릴 여유 없는 장미리는 호텔 이사 장명훈(김승우)부터 말단 종업원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미인계를 쓴다.
취업과 양심을 교환하는 이소영과 장미리는 대학원을 나와도 직장 찾기가 어려운 요즘 세대의 자화상이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직장에서의 고군분투 역시 용케 들어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반 회사원들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
‘동안미녀’와 ‘미스 리플리’를 ‘미스터 큐’와 비교해 보면 암담하게 바뀌어버린 현실이 보인다. 하지만 복장학원 잠깐 다닌 게 전부인 이소영이 디자인 실력을 인정받아 깜짝 채용되고, 할 줄 아는 건 일본 하카타 지방 사투리밖에 없는 장미리가 도쿄대 다녔다는 거짓말로 호텔에서 중책까지 맡는 건 드라마는 결국 판타지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게다가 두 여주인공 모두 번듯한 남자까지 한 손도 아니고 양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현실은 훨씬 더 냉혹하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며 현실에서 도망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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