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궁금한 배우였다. 이름부터가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이름이었고, 소름 끼치도록 연기를 잘 하는데, 배우뿐만 아니라 연출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게다가 항간에 떠도는 ‘까칠한 카리스마’에 관한 소문도 무성했다.
배우 이항나(41)씨를 만난 것은 연극 ‘아시안스위트’의 연습이 한창이던 6월의 오후. 그녀는 약속장소인 대학로의 한 카페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나타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영(Young)’한 외모가 빛났다. 기자와 동년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 요즘 속된 표현으로 전생에 나라를, 그것도 몇 번씩 구했나 싶다.
이항나씨는 재일교포 3세대 여배우 고 김구미자씨의 유작으로 잘 알려진 연극 ‘아시안스위트’ 한국초연에서 주연을 맡았다. 김구미자씨가 연기한 바로 그 배역, ‘치요코’ 역이다.
최근 우리나라 연극판을 들었다 놨다 한 명작 ‘야끼니꾸 드래곤’의 작가 정의신씨가 쓴 작품이다. 정의신 작가는 김구미자와 오랜 인연이 있다고 전해진다. ‘아시안스위트’는 김구미자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정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쓴 작품이다. 일본 열도를 눈물바다에 빠뜨리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다음은 이항나씨와의 인터뷰 무삭제 정리판이다. 말투뿐만 아니라 호흡, 토씨까지 이씨 특유의 말맛을 살리기 위해 좀처럼 쓰지 않는 녹음기를 사용했다. ‘아시안스위트’의 첫 공연은 6월 30일에 열렸지만, 이 인터뷰는 연습기간 중에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 첫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국 초연인데, 아무래도 좀 더 부담이 되겠지요?
“배우들은 뭘 하든, 다 초연하는 것 같죠.”
똑 부러진 답변.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인터뷰를 풀어가기가 쉽지 않다. 살짝 에둘러가기로 한다.
이씨에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기 관련 러시아 유학파 3인조 중 최연소자’라는 다소 긴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동국대학교 88학번인 이씨는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러시아로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떠났다. 지금과 달리 이념의 장벽이 덜 녹아내린, 러시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 얘기를 꺼내니 “너무 오래된 얘기인데요”하며 빙긋 웃는다. 웃으니 근방 5미터 이내가 환해지는 것 같다.
“졸업 후 대학로에 진출하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유학은 분위기에 휩싸여서 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1980년대 후반, 연극학도들에게 러시아는 최고의 로망이었다. 연극에 열정이 있는 젊은이이라면 한번쯤 러시아 유학을 꿈꾸던 시절. 그곳에는 펄펄 끓어 핏줄이 터질 것만 같은 젊은 피를 식혀줄 뭔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원래는 뉴욕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학비 문제도 있고(러시아는 싸잖아요), 여하튼 ‘으¤ 으¤’하던 멤버들이 있었거든요. 6명이 우르르 러시아로 가기로 한 거죠.”
러시아에 딱 떨어지니 로망은 훨훨 날아가고, 등골 시린 현실만 남았다.
“먹을 게 없더라고요. 아줌마들이 두 개씩 들고 파는 빵, 식료품 가 봐도 썩은 감자만 있고 … 하여튼 처음 6개월 동안 쌀을 못 구해서 빵만 먹었더니 살이 찌더라고요.”
유학 떠난 딸이 걱정돼 러시아로 날아온 어머니가 살이 포동포동 찐 딸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항나, 넌 아무래도 러시아 체질인가 보다”
사기도 당했다. 동포(당시는 고려인이라고 했다)라는 사람이 중개를 해 이항나 일행에게 비싼 값을 받고 아파트를 얻어주었는데, 이게 말도 안 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씨의 표현에 따르면 “100불을 주고 빌렸다면, 실제 가치는 5불도 안 되는 집”이었다.
“창문은 다 깨지고, 싱크대에는 문짝이 없고, 쥐가 왔다갔다하지 않나, 심지어 불도 안 들어왔죠. 처음엔 몰라서 ‘러시아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구나’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다른 사람 집에 가 보니까 웬걸. 우리나라보다 더 좋더라고요.”
두 달쯤 꾸역꾸역 살고 있는데 웬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겨우 대화를 했다. 할아버지의 정체가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에만 2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당신들 다 나가라!”
“그 할아버지도 우리처럼 사기를 당한 것”이라며 이씨가 “하하하” 웃었다. 웃는 모습이 천진하게 느껴졌다. 인터뷰의 분위기가 슬슬 프라이팬 위의 버터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 정의신이라는 작가는 한국에서도 유명하죠. 대가의 카리스마가 느껴집니다. ‘카리스마’하면 사실 이항나씨도 만만치 않죠.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은 ‘정의신’과 ‘이항나’의 충돌 또는 화합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어느 쪽일까요.
“‘야끼니꾸 드래곤’을 보면서 정의신이라는 작가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극중 아주 미세한 배우 호흡이 느껴지는데, 이건 연출자의 머릿속에 없으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연출자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죠.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두 번은 안 하고 싶어요. 그 사람의 호흡을 계속 갖고 할 수는 없으니까.”
“러시아에서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본의 아니게 열심히 (공부)했죠(하하!). ‘아시안스위트’란 작품 안에는 체호프가 많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체호프의 작품은 고급스럽잖아요? 그런데 정의신이라는 작가는 이걸 시장바닥에 풀어놓은 거죠. 그런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작가가 살아온 인생도 생각해 보고 싶고. 정의신이란 사람은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 그런 그의 배우가 되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1998년 연극 ‘갈매기’에서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니나’로 출연해 기존의 해석을 뒤엎었던, 그리하여 일약 연극계의 중심에 섰던 이씨는 2007년 까마 긴까스라는 거장 연출자를 만나 다시 한 번 ‘갈매기’ 무대에 서게 된다.
“‘니나’를 하겠다고 하니까 ‘넌 절대로 못 시킨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유인즉슨 ‘넌 이제 아가씨가 아니고 여자다’라는 것이었죠.”
까마는 독설가였다. 그는 이씨에게 “너의 지겨운 멜로드라마적인 연기 습관은 진짜 꼴도 보기 싫다”라고 했다. 사실 이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의 독설 세례를 받아야 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따로 없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연기만큼 트렌드에 민감한 예술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변화해야 했다.
“우리 표현으로 ‘쪼가 붙는다’라는 게 있어요. 자기가 잘 하는 것이긴 한데, 개발이 안 되고 마모가 되어 나쁜 습관으로 남는 것. 배우에게는 일종의 덫이죠. 내게도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 왔어요.”
그런 점에서 이번 ‘치요코’ 역도 김구미자씨의 ‘치요코’와는 사뭇 달라질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좀 밝아질 겁니다. ‘치요코’가 다리를 전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다리를 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경이 안 쓰이게 하기 위해 밝아졌겠죠. 내가 가난해봐서 아는데요, 가난하다고 ‘죽상’을 쓰고 있으면 안 되는 거거든요. ‘치요코’는 혼자 살았잖아요. 제사도 맡아서 하고, 동생도 돌보고. ‘억척스럽다’라는 걸 기본적으로 깔고 가야죠.”
- 이항나씨는 배우 못지않게 연출가로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출가 입장에서 ‘연출가 겸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것이 좀 부담스러울 것도 같은데요.
“그래서 이제 연출은 그만 두려고요(하하하!). 진짜로 섭외제의가 많이 줄었어요. 앞으로 연출은 비밀리에 붙이고 해야겠어요(하하!). 배우 선배들이 ‘야, 너 배우해. 자꾸 연출하면 아무도 안 써준다’하기도 해요.”
- 배우하고 연출 중 어느 쪽에 더 재능이 있다고 느끼시나요.
“사람마다 달라요.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보다 연출작을 더 흥미롭게 봤다는 사람들도 많고. 재능이라 … . 배우를 막 하다 보면 연출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연출을 하면서 배우들 하는 걸 보면 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우하하!).”
예전에는 실력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배우로서도 그런 편이었지만, 연출가 이항나는 “상당히 무섭다”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조금 그랬는데요. 이젠 안 그러기로 했어요. 힘도 딸리고요. 너무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덕장이 좋잖아요.”
이씨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미지 중 ‘카리스마’는 그렇다 쳐도, ‘럭셔리하게, 편하게 배우 생활한다’라는 데 대해서는 “억울하다”고 했다.
“유학 다녀와서는 부모님에게 천원 한 장도 못 받았어요. 극단을 꾸리면서 고생 많이 했죠. 찜질방에서 며칠씩 자기도 하고, 신용불량자도 몇 번씩 되어 보고.”
이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하는 이유에 대해 “연극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이씨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지만 소극장 연출 작업과 겹쳐 영화를 포기한 일도 있다.
“미친 거죠. 자랑이 아니라,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연극이란 것은 제게 소중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을 못 보고 살았어요. 연출을 할 때도 ‘이 작품은 베스트가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만 가득 차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미처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죠. 후회합니다.”
뮤지컬 연출을 맡았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독일에서 성악을 전공한 배우가 있었는데 이씨보다 한 살이 어렸다. 연습실에서 이씨가 얼마나 다그쳤는지 배우로서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이씨를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말인즉슨, 꿈에 이씨가 칼을 들고 나타나더니, 자신의 목을 조르더라는 것이었다.
이씨는 “내가 그 배우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칼로 찔러버리겠다’라고 했던 모양이에요. 농담이었는데 …”라고 했다.
2007년 결혼을 하고, 이후 아이를 낳으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변했다. 주변에서도, 가르치는 제자들로부터도 “많이 변했다”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 좋은 배우는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좋은 배우는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연출가는 좋은 배우가 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출가가 무대에 서기에는 시선이 너무 객관적이니까요.”
- ‘이항나’라는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이름입니다. 이름에 대한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해방기까지 우리나라 악극계의 대부셨죠.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문인이기도 하셨고.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노래의 작사가시기도 해요.”
‘항나’라는 이름은 달에 사는 선녀 ‘항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어려서는 이 이름이 너무도 싫었다. 아이들이 늘 ‘항문’, ‘항아리’라고 놀려댔다.
“어려서 시골에 살았던 때가 있었는데, 시골 분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부르시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주로 ‘샹나’라고 부르셨죠. 심지어 윤석화 선생님은 아직도 저를 ‘항라’라고 쓰세요.”
- 슬슬 인터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아시안스위트’를 기다리고 있는 관객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제가요, 요즘 ‘나가수’를 보면서 ‘이제 슬슬 연극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조금은 진정성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거죠. 쇼보다는 진중하고, 전통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게 아닐까요. 뭔가 위로를 받고 싶은데, ‘노래방 위로’가 아닌 다른 차원의 위로. 그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아시안스위트’가 딱이죠. ‘나가수’처럼 서사가 있는, 진정성을 만날 수 있는 작품. 누구나 안고 있는 상처를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갈 수 있는 작품입니다. 곧 무대에서 뵙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기도 전, 그만 배우 이항나의 ‘치요코’를 보고 싶어 못 견딜 정도가 되어 버렸다. 끝으로 이씨가 꼭 전해달라고 한 말.
연극 ‘아시안스위트’는 6월 30일부터 7월 14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합니다. 다른 공연과 달리 월요일 오후 8시 공연이 있고요, 화요일에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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