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발의 흔적인 짧은 머리, 그 아래 구릿빛 얼굴과 쏘아보는 눈빛. 류승룡(41)은 아직 ‘최종병기 활’의 만주족 장수 쥬신타 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를 만난 그는 거칠게 “반갑다”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 영화 속 단문의 만주어 대사를 내뱉던 쥬신타처럼.
10일 개봉한 영화는 지난 주말까지 31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해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3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 신궁(박해일)이 활 하나로 적진에서 여동생(문채원)을 구한다는 단순 명쾌한 스토리와 박진감 넘치는 활 싸움,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이 여름 관객을 끌어 모았다. 쥬신타의 호방한 모습에 대한 찬사도 이어지고 있지만 류승룡은 고생한 기억부터 되새김질했다.
“촬영 전 만주어, 활, 승마를 열심히 준비했죠. 그런데 정작 ‘유산소 운동’, 쉽게 말해 달리기가 문제였어요. 촬영 내내 무거운 갑옷과 사극용 장화를 신고 산속을 뛰었죠. 갑옷 두 벌이면 성인 남성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겁거든요. 촬영 첫날 한 배우는 탈진해 졸도했어요.”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만주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배우는 가슴과 눈, 그리고 호흡으로 (감정을) 전할 수 있어야죠. 하지만 정확히 발음하기 위해 대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수도 없이 외웠어요.”
그가 빚어낸 인물 쥬신타는 영화에 나오는 만주족의 육량시(화살촉 무게만 240g인 화살)처럼 ‘오랑캐’ 만주족에 대한 선입견을 정조준한다. 역사적 대의에 충실하면서도 목숨 걸고 부하들을 지켜내는 인간적인 모습에, 관객들은 적장인 그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다.
“쥬신타는 안타고니스트(극중 적대적 인물)죠. 하지만 용장이면서도 덕장입니다. 그는 조카인 왕자를 잃었을 때도 소리를 지르기보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적을 쫓는 것으로 분노를 표현하죠.”
여성 관객들도 주인공 박해일보다 쥬신타가 이끄는 야성적인 만주족 전사들에게 더 열광한다. “요즘 영화를 보면 남자 배역들 중에 잔인한 악역, 또는 야들야들한 여성적 캐릭터가 많아요. 그러다보니 날것 그대로의 남성성을 간직한 전사들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끼는 것 아닐까요.”
그는 올해 영화 4편에서 줄곧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를 소화했다. 장훈 감독의 ‘고지전’에서는 북한군 장교 역을 맡아 오합지졸 한국군 잔병들에게 “너희들이 전쟁에서 지는 이유는 싸우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코믹한 장면이 많은 사극 ‘평양성’에서는 홀로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고구려 장수로, 개구리 소년들의 실화를 다룬 ‘아이들’에서는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을 찾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 교수로 나왔다.
“비슷한 캐릭터를 반복한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죠. 거기다 만주어와 변발, 그리고 끝없는 추격신 등 힘든 역할이란 걸 알았지만 쥬신타는 배우 인생에서 꼭 도전해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최민수 이후에 그만큼 강렬한 눈빛으로 말하는 배우가 또 있을까. 하지만 그의 강한 카리스마가 주변 배역들을 죽인다는 비판도 있다. “저는 영화라는 숲의 한 그루 나무예요. 제 역할을 조절하는 건 감독의 몫이죠. 지금까지 함께한 감독들은 나무가 웃자라 숲을 해치면 가지를 자르고, 모자라면 더 뻗도록 잘 지도해 왔다고 봐요. 카리스마 연기라기보다 극중 갈등을 극대화하는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앞으로 열리는 각종 영화제에서 연기상 욕심이 나겠다는 말로 헤어지는 인사를 대신하자 그가 다시 쥬신타처럼 말했다. “(만주어 연기 때문에) 외국어 연기상이 있다면 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하하. 저보다는 고생한 만주족 부대원들에게 상이 돌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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