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의 할리우드, 흑백 무성영화에 경배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8일 03시 00분


■ ‘아티스트’ 올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 5개 부문 석권


몇 세대 뒤 영화사가들은 2012년 흑백 무성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쓴 이변을 잊지 못할 것이다. 3차원(3D) 기술을 필두로 하이테크가 영화의 패러다임을 지배하는 시대에 표정 연기와 진정성 있는 스토리만으로 승부를 건 ‘아티스트’의 반란은 충격이었다.

올해 아카데미의 키워드는 ‘복고와 향수’다. 작품상 후보에는 유달리 ‘과거’를 담은 작품들이 많았다. ‘아티스트’는 20세기 초 무성영화 시대 남녀 배우의 사랑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휴고’는 1900년대 초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소년 휴고의 모험담을 담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워 호스’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말과 소년의 우정을 그렸다. 경제위기로 팍팍해진 미국의 분위기가 스크린에서도 과거에서 위안을 찾도록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아티스트’의 감독과 주연 남자 배우가 프랑스 출신인 점도 눈길을 끈다. 2003년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프랑스와 폴란드 이중국적) 이후 프랑스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은 “이런 무모한 영화에 돈을 쏟아 부은 투자자와 강아지 배우 우기에게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비기너스’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82세의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역대 배우 부문 최고령 수상 기록을 갈아 치웠다. 이전 기록은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여우주연상을 받을 당시 80세의 제시카 탠디였다.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헬프’의 옥테이비아 스펜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남자 배우들을 옆에 앉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익살을 떨었다. 올해 최다인 11개 부문 후보에 오른 스코세이지 감독의 ‘휴고’는 작품, 감독상 등 주요 상 수상에 실패한 채 촬영, 음향편집상 등 5개 기술부문 수상에 만족해야 했다.

핵 위기로 미국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외국어영화상을 탄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을 통해 이란의 사회상을 밀도 있게 그려낸 이 영화는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아시아 문화는 지금 정치적인 문제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모든 문명과 문화를 존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혔다.

올해 시상식은 어느 해보다도 화려하고 재미있는 무대로 꾸며졌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남자 주인공으로 친숙한 빌리 크리스털이 2004년 이후 8년 만에 시상식 사회자로 돌아와 녹슬지 않은 입담을 선보였다. 영화의 역사를 주제로 한 ‘태양의 서커스’ 팀의 화려한 공연도 돋보였다. 후원사인 코닥의 파산 위기로 인해 내년부터는 코닥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상식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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