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배우는 자신의 내면을 발화시켜 연기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배우에게 던지는 기자들의 질문 중 가장 멍청한 질문은 다음 질문이다. “극중 역할을 실감나게 연기했는데요. 실제 당신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나요?”
배우는 자신의 내면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면모나 감성은 결코 제대로 연기할 수 없다. 만약 연쇄살인마 연기를 소름끼칠 만큼 충격적으로 보여줬다면, 그의 영혼 속에는 분명 ‘악마’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무의식 깊숙이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해내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엑스터시를 느끼고, 심지어는 정체성의 혼란마저 느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정치인이 아닌) 배우 문성근이 보여준 연기는 내가 지금껏 목격해온 그의 어떤 연기보다도 훌륭했다. 그는 영화에서 ‘피해자’로 설정되어 피고인석에 서는 전직 대학교수(안성기)를 법정에서 무참히 깔아뭉개는 이른바 ‘꼴통 보수’ 판사로 등장한다. 권태롭고도 짜증나는 듯한 표정으로 “다들 조용히 하세요” “기각합니다” 하고 짧게 내뱉는 대목에선 발로 밟아버리고 싶을 만큼 더럽고 나쁘고 악질적이고 얄미운 존재감을 연기해내는 것이다.
나는 문성근의 이번 연기를 보면서 그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념과 이상을 추구하는 방식이 참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알려졌다시피 ‘진보’를 지향하는 예술가인 그는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꼴통 보수’를 실감나게 연기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극중 자신을 극도로 미워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결국 자신이 현실세계에 대한 이념적 예술적 발언을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메커니즘은 그가 출연한 강우석 감독의 2006년 작 ‘한반도’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미국과 일본 없이는 대한민국이 결코 먹고살 수 없다’며 국민을 깔보는 ‘꼴통 보수’ 국무총리로 등장해 관객을 한껏 열 받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존재를 연기한다면 그 연기 속에는 그 얼마나 사무친 분노와 한이 서려 있을까 말이다.
최근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여배우 메릴 스트립은 내게 더 큰 생각거리를 선물해주었다. 그녀는 과격한 보수주의자였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철의 여인’으로 두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가 또한 몸서리쳐질 만큼 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조의 파업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철함으로 맞서는 대처의 모습을 연기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대처인지 대처가 그녀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가 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대처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기란 참으로 힘들다.
내가 스트립이 정녕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녀가 ‘열혈’ 민주당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과는 정반대 방향에 서 있는 대처라는 인물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스트립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대처의 정치론이 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하지만 이념을 떠나, 여성의 몸으로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보수적인 영국에서 그 모든 것들을 이뤄낸 것은 정말 짜릿한 일이었다”고.
문성근과 메릴 스트립. 진보를 지향하는 두 예술가는 자신들의 이념과는 반대 지점에 선 인물들을 똑같이 연기했지만, 그들의 내면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이렇게 서로 달랐다. 그래서 예술은 참으로 모순적이면서도 참으로 진실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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