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사무적 섹스 전락한 ‘후궁’…이게 파격?”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2일 03시 00분


리들리 스콧 빈곤한 상상력에 낙망, 사무적 섹스 전락한 ‘후궁’에 실망

현충일이던 6일, 하루 날을 잡아 영화 네 편을 삼각김밥 먹어가며 7시간 40분 동안 보았다. 가장 먼저 본 영화는 강지환 주연의 코미디 ‘차형사’, 두 번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맨인블랙3’, 세 번째는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 마지막은 ‘프로메테우스’였다. 특히 기대한 작품은 나의 메마른 몸과 영혼에 단비를 내려줄 ‘후궁’과 인류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신작 ‘프로메테우스’였다.

네 편에 대한 소감? 이런 경우도 참으로 드물다. 네 편 모두 기대 이하라니! 하루에 소개팅 네 번을 해도 그중 한번은 괜찮지 않은가 말이다.

‘차형사’는 원래 기대도 안 했으니 졸작이어도 하나도 실망스럽지 않지만, ‘후궁’은 매우 당혹스러웠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격정적 정사 장면’이라든가 ‘파격적 노출’이라고 이 영화를 평가했던 영화기자나 평론가들이 딱하게 여겨졌다. 도대체 그들의 성생활은 평상시 얼마나 꽉 막히고 점잖기에 겨우 이런 정도의 섹스와 노출을 가지고 ‘파격적’ ‘격정적’이라며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단 말인가. 쯧쯧. ‘너무 많은 캐릭터를 통해 너무 많은 사연을 말하려다가 결국은 한 가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이 영화를 보면서 더욱 짜증이 난 것은 하나도 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궁’이라는 야한 단어도 모자라 ‘제왕의 첩’이라는 ‘확인사살’용 부제까지 덧붙인 이 영화의 단도직입적인 제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이 영화의 마케팅 포인트는 섹스와 노출이다. 게다가 주연 여배우가 각종 인터뷰를 통해 “노출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에요”라든가 “노출에만 관심을 두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요”라고 밝히면 밝힐수록 나처럼 욕망의 노예로 사는 아저씨 관객들의 귀에는 “노출이 이 영화의 전부예요, 아흥”이라는 환청으로 들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 말은, 더 벗거나 더 저질스러워야 했다는 주장이 아니다. 캐릭터들의 내면을 절박하게 파고들지 못하는 탓에 이 영화 속 섹스는 권력욕, 소유욕, 질투, 자기도착 같은 욕망의 저주스러운 결정체가 되지 못한 채 매우 의례적이고 심지어 사무적으로까지 느껴지고 말았다는 얘기다. 욕망이 휘발된 섹스는 김빠진 사이다, 패드 빠진 뽕브라, 입술 없는 앤젤리나 졸리가 아닌가 말이다.

‘후궁’만큼이나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거장’ 소리를 듣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이었다. 뭔가 생각할 게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생각할 것도 별로 없는 한 줌짜리 상상력을 가지고는 ‘프로메테우스’라는 있어 보이는 제목으로 잔뜩 폼만 잡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올해로 75세인 이 노장 감독이 측은하게까지 여겨졌다.

진정한 거장이란 무엇인가. 죽는 순간까지도 새롭고 놀라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가 바로 거장이다. 또한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를 더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입 다물고 죽을 때까지 침묵할 수 있는 절제와 용기를 가진 이도 바로 거장이다. 하지만 늙어갈수록 동네 할아버지처럼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리들리 스콧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가 더이상 거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품게 되었다.

아, ‘블레이드 러너’와 ‘에일리언’을 통해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닌 듯 조용히 말을 시작해 어느새 우리의 영혼을 펑 뚫어놓는 놀라운 생각거리를 던졌던 거장 리들리 스콧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인류의 기원’ 같은 거창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자신의 노욕부터 제대로 다스려야 할 것 같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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