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1997년 머리끄덩이 패싸움 아시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7일 03시 00분


1990년대 아이돌 1세대 H.O.T-젝스키스 팬문화, 요즘과 비교해보니

적막이 흘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250명의 살벌한 눈빛만이 오갔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앞마당에서 촬영된 빗속의 난투극 현장이다.

1997년 연말 가요 시상식 공개방송에 입장하기 전 대치하고 있는 흰색 옷의 H.O.T 팬들과 노란색 일색의 젝스키스 팬들. 당시 이들에게는 ‘오빠’들이 전부였다.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팽팽한 기싸움 현장을 재연했다. CJ E&M 제공
1997년 연말 가요 시상식 공개방송에 입장하기 전 대치하고 있는 흰색 옷의 H.O.T 팬들과 노란색 일색의 젝스키스 팬들. 당시 이들에게는 ‘오빠’들이 전부였다.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팽팽한 기싸움 현장을 재연했다. CJ E&M 제공
“10만 대군의 우두머리, 그분이 오셨다!”

두꺼운 더플코트를 입고 책가방을 멘 여고생들이 노란 비옷과 흰 비옷을 뒤집어쓴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이른바 ‘문희준 헤어스타일’로 머리카락을 잔뜩 부풀린 H.O.T 팬클럽 전국 회장이 등장한다. 그에 맞춰 젝스키스 팬클럽 회장도 무리의 앞에 선다. 검정 발토시를 무릎까지 잔뜩 올린 포스가 만만치 않다. 껌을 씹으며 야릇한 미소를 짓던 그는 비장하게 외친다. “야! 가자!”

○ 전설의 패싸움

황의(黃衣)와 백의(白衣) 대군 250명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치열하게 벌인 패싸움은 1997년 12월 연말 가요 시상식을 앞두고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젝스키스와 H.O.T 팬들이 서로 “우리 오빠들이 대상을 탄다”고 설전을 벌이다 대규모 몸싸움으로 번진 것. 이 사건은 아이돌 팬 역사에 ‘전설의 패싸움’으로 남았다.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이 장면을 재연하면서 극적인 재미를 살리기 위해 살수차까지 사용했다. 이 장면은 21일 방송을 통해 공개된다.

2일 한 카페에서 만난 직장인 민경실 씨(32)도 살벌했던 겨울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민 씨는 15년차 ‘젝키’ 팬이다. 민 씨와 인피니트 팬클럽 회원인 대학생 김소연 씨(21)를 만나 1990년대와 2010년대 ‘팬심(心)’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 ‘왕언니’ vs 기획사 직원

민 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왕언니를 우두머리로 해서 천리안, 하이텔의 카페 회장들과 임원들 순으로 서열이 매겨졌어요”라고 말했다. 김 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경실 언니, 요즘엔 팬클럽 회장이 없어요. ‘팬매니저’가 회장 역할을 하는데 기획사 직원이에요. 임원들도 그렇죠.”

1990년대 팬들은 전화사서함을 기반으로 지침이 떨어지면 단체로 움직였다. 젝키 팬클럽의 경우 ‘152-××××’를 누르면 팬클럽 회장이 오빠들의 스케줄을 읊어줬다. ‘○일 오빠들의 스케줄이 ○시 ○에서 있으니 ○로 모여라’는 식이다.

“그땐 휴대전화도 없고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아 학교 쉬는 시간에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화사서함을 들었죠. 지령을 받으면 항상 ‘그 공원’에 모두 모여요. 저희가 진짜 ‘떼문화’죠.”(민 씨)

“인피니트 팬들은 카페나 트위터에서 오빠들 스케줄을 받아요. 휴대전화로 간편하게 확인하죠. 요즘엔 우르르 안 가요.”(김 씨)

1990년대엔 아이돌 사진과 캠코더 영상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 휴대전화 카메라가 없어 사진이 귀했다. 당시 300∼500원짜리 사진들을 코팅해서 가방에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민 씨는 고등학생 때 직접 만든 젝키 필통과 배지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가게에서 산 오빠들 사진을 오려 마분지 필통에 붙였죠. 투명 비닐을 입히며 뿌듯했어요. 나만의 ‘젝키 필통’이죠.”

1990년대 팬들은 경쟁 그룹에 대한 호불호가 솔직함을 넘어 과격했다. 각종 공개 녹화 현장에서 H.O.T와 젝키 팬들이 싸운 사례는 부지기수다. 게다가 H.O.T 팬들은 여성 그룹인 베이비복스에, 젝키 팬들은 핑클에 대해 안티활동을 벌였다. 민 씨가 “핑클은 같은 기획사 소속이라서 오빠들과 ‘엮일까봐’ 싫어했죠. 녹화 현장에 핑클이 나오면 단체로 ‘꺼져라’라고 외쳤어요. 핑클 멤버들이 울면서 나간 적도 있었죠”라고 했다. 김 씨가 되받아 말했다. “언니, 요즘엔 그러면 큰일 나요. 우리 오빠들이 욕먹으니까.”

대화가 끝난 뒤 민 씨가 ‘아이돌 팬’ 선배로서 김 씨의 손을 꼭 잡았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김지은 인턴기자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최서영 인턴기자 성균관대 법학과 졸업
#TV#응답하라 1997#아이돌 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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