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한적한 마을로 이사 간 소녀(박보영)가 야생 속에 살아온 의문의 늑대소년(송중기·사진)을 발견한다. 소녀는 금수나 다름없는 늑대소년에게 옷 입는 법, 밥 먹는 법, 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결국 둘은 정분이 난다. 늑대소년을 대자연으로 돌려보낸 뒤 마을을 떠난 소녀. 그는 외국으로 가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어느덧 부유한 백발 할머니가 되어 산마을로 돌아와 보니, 하나도 늙지 않은 늑대소년은 무려 47년간 소녀만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었다. 소녀가 남긴 ‘기다려…’라고 쓰인 쪽지 하나를 수십 년간 품은 채….
아,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내용인가. 영화 ‘늑대소년’은 ‘오직 나만을 영원히 사랑해주는 남자’에 대한 소녀들의 판타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영화를 본 남자들은 10대나 나 같은 아저씨들이나 “짜증 제대로 난다”며 투덜거리지만, 여자들은 10대 소녀나 중년이나 “아, 왜 내 곁에 있는 남자는 저러지를 못하느냐”면서 “송중기 같은 남자 어디 없느냐”고 난리도 아니다.
남자인 나는 송중기가 미워 죽겠다. 송중기, 나 너 미워. 싫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라는 TV 드라마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왜 이 자는 모든 걸 다 바쳐 한 여자만을 죽도록 사랑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로만 출연해 저 혼자 여자들 사랑 독차지하고, 나 같은 평범한 남편들을 ‘천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느냔 말이다.
이 영화 속 늑대소년에는 여성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성상이 200% 포개져 있다. 이 영화를 보건대, 여성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일단 송중기처럼 잘생기고 귀여워야 한다. 만약 영화 속 늑대소년이 달덩이 같은 얼굴에 배가 튀어나왔더라면 박보영이 사랑했을까? 둘째, ‘야성적’이되 ‘야생적’이어선 안 된다. 늑대의 기질을 발휘해 여자를 괴롭히는 괴한 열댓 명 정도는 단숨에 물어뜯어버릴 야성이 있어야 하지만, 피 철철 흐르는 생고기를 씹어 먹거나 배고프다고 동네에 돌아다니는 양의 목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셋째, 행동만 할 뿐 입 다물고 살아야 한다. 영화 속 송중기처럼 “가지 마”라는 외마디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말 것이며, 여자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동하여야 한다. 넷째, 평생 한 여자만을 목숨 걸고 사랑해야 하며, 심지어 그녀가 배신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도 평생 그녀만을 죽어라 생각하면서 맹꽁이처럼 기다려야 한다. 마지막 다섯째, 아무리 여자가 늙고 시들어도 언제나 “이렇게 예쁜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고 진심으로 말해주며 쓰다듬어줘야 한다.
아, 어떤가. 이런 남자, 세상에 있는가. 여자가 “먹어” 할 때만 밥 먹고, 여자가 “기다려” 하고 외국으로 떠나 다른 돈 많은 남자 만나 실컷 산 뒤 47년 만에 돌아와도 여전히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남자라니…. 그렇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은 보편적 이성과 판단력을 갖춘 남자가 아니라, 바보 혹은 셰퍼드가 아닐까 말이다.
나처럼 제 앞가림만으로도 숨이 차고 ‘날 배신하는 여자에겐 마땅한 응징이 가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속이 좁쌀만 한 남자들은 여자를 신앙처럼 여기고 오로지 섬기는 영화 속 늑대소년이 남성에 대한 잘못된(아니 불가능한) 평가기준을 세상 여성들에게 바이러스처럼 확산시킬까봐 영 못마땅하고 심히 걱정스러운 것이다.
세상 여성들에게 간절히 말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말 그대로 세상 어디에도 없다! 늑대소년? 그런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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