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맑음. 비가 오지 않는 겨울. 마지막 트랙 #36 Ryuichi Sakamoto ‘1919’(1996년)
1987년 어느 날, 아주 어린 꼬마였던 난 극장 객석에 앉아 있었다. 대전에서 가장 큰 극장이었으니 대전극장 아니면 아카데미극장이었으리라. 어머니와 함께였고.
극장에만 가면 잠이 왔다. 그날도 절반 이상은 졸았다. 이제 보니 2시간 40분짜리 영화였구나. ‘마지막 황제’. 온통 붉은색 계열의 화면과 웅장한 쯔진청(紫禁城·자금성)의 풍경, 그리고 영화 후반부의 지루하고 우울한 느낌이 안개처럼 기억날 뿐이다. 장면으로는 딱 두 부분이 선명하다. 어린 황태자 푸이가 궁 안을 뛰어다니다 문득 쯔진청 안마당 쪽으로 뛰어나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하례를 받는 장면. 극 막바지에 잘생긴 일본군 장교가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을 듣고 권총으로 자결하는 장면. 아! 그리고 귀뚜라미….
그 장교가 어젯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사카모토 류이치. 첼로(자케스 모렐렌바움), 바이올린(주디 강)을 대동한 트리오 구성으로 피아노 건반 앞에 앉은 사카모토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무대 위 조명은 몇 개의 스포트라이트만으로 구성돼 극장 전체가 매우 어두웠다. 극도로 자제된 조명 아래 객석에서 솟아오른 머리들은 매우 느린 템포로 연주되는 그의 대표곡들을 듣고 있었다. 마치 세파를 떠돌다 이름 모를 해변에 떠밀려와 우연찮게 지구 자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조약돌들처럼 보였다.
‘마지막 황제’의 메인 테마도 연주됐다. 사카모토의 건반 위에, 내 눈앞에 잠깐 쯔진청과 만주의 겨울이 펼쳐졌다. 세 연주자의 섬세한 합(合)이 놀라웠다. 피아노 솔로 곡(‘솔리튜드’)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피아니시모에는 노르웨이의 숲을 메운 자작나무의 떨림 같은 잔향이 스며있었다.
수첩 넘기는 사각거림이 미안할 정도로 시종 느리고 조용하게 진행되던 공연은 마지막 곡 ‘1919'에서 폴리리듬과 불협화음으로 대립하는 피아노와 첼로의 솔로 혈투, 신경질적인 스타카토로 산화했다. 앙코르 곡은 ‘마지막 황제’의 ‘레인’이었다. 공연장을 나서자 바깥세상은 얼어붙어 있었다. 1987년 어느 날, 스크린 안에 내리던 비는 지금쯤 그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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