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
2013년 4월 29일 비. 인간기계. #56 Kraftwerk ‘Radio-Activity’(1975년)
지적인 외모와 달리 내 독서의 절반 이상은 인생 초기 15년 안에 이뤄졌다. 꼬마 때 서가에서 ‘인도동화집’ ‘프랑스동화집’ 같은 걸 한 권씩 쏙쏙 빼 뒤적이던 재미는 쏠쏠했다.
‘오즈의 마법사’의 충격이 기억난다. 뇌가 없는 허수아비와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도 섬뜩했지만 꿈을 이뤄준다던 오즈의 마법사가 기계덩어리라는, 아니 알고 보면 그걸 조종하는 콤플렉스를 지닌 과학자라는 반전은 소름끼쳤다.
10대 후반, 내 관심은 형의 LP 컬렉션으로 옮겨갔다. 록 음반들 틈에서 독일 그룹 크라프트베르크의 ‘라디오-액티비티’(1975년)는 튀었다. 차가운 신시사이저와 기계적인 비트, 무선 전신 소리…. 기계가 만든 음악 같았다. 그들은 실제로 기계음만으로 채운 대중음악을 상용화한 전자음악의 조상이다. 멤버들은 프로필 사진에 마네킹이나 로봇을 내세우거나 노래로 ‘우린 로봇!’이라 선언하기도 했다.
27일 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차장에 특설된 돔형 공연장에서 열린 크라프트베르크의 첫 내한공연 무대에 나란히 선 네 명의 멤버는 3D 매핑(입체감 있는 물체에 영상을 입히는 기술)으로 투사된 듯한 착시를 주는, 격자선이 들어간 우주복 같은 걸 입고 있었지만 사람으로 보였다. 입구에서 3D 안경을 받았다. 연주(조종이란 말이 어쩐지 더 어울린다)하는 멤버들 뒤로 가로 16m, 세로 6m의 3D 스크린이 펼쳐졌다. 첫 곡 ‘더 로보츠’부터 영상 속 인물과 디자인 패턴들은 무대에서 객석 쪽을 향해 입체로 다가섰다. 원색과 몇 개의 선으로 단순화된 우주 공간(‘스페이스랩’), 빌딩 숲(‘메트로폴리스’), 고속도로와 고속전철(‘아우토반’ ‘트랜스-유럽 익스프레스’), 계산기(‘덴타쿠’)와 알약(‘비타민’)이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객석 후방에 설치된 두 대의 스피커를 활용한 입체적인 음향 연출도 돋보였다. ‘40Hz(헤르츠)’부터 ‘4만 Hz’까지 새겨진 유리알 수만 개를 객석에 뿌린 듯 선명한 음향은 영상과 맞물려 2시간 동안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미니멀리즘의 포박에서 풀려나 공연장을 나서니 온갖 냄새와 잡티, 욕망이 들끓는 진짜 세상이 다시 나타났다. 차라리 오즈의 마법사가 되고 싶어졌다.
근데 잠깐. 크라프트베르크 멤버들, 1940∼50년대생이잖아. 근데, 왜 22세기식 콘서트를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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