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듯 가족이 주는 의미, 그 구성원 혹은 그 개개인의 역할도 끊임없이 바뀐다.
9일 개봉하는 ‘고령화가족’은 얼핏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와 맞닿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더 찡하게 다가오는 이 영화가 제대로 힘을 낸 건 배우들이 펼친 연기, 호흡, 열정이 한 데 녹아든 덕분이다. 그 중심에 배우 박해일(36)이 있다.
영화는 노모에게 얹혀사는 구제불능 삼남매의 이야기다. 가족 중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나와서 사람 구실하고 살 줄로만 알았던’ 둘째 아들 오인모를 연기한 박해일은 “무조건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돌이켰다. 이유가 있다.
“오인모는 인간 중에서도 최악이니까. 기사회생이 불가능한 남자, 상처가 낫더라도 그 타박상이 오래 없어지지 않을 남자이니까. 감정이 꺼지지 않게 하려면 현장을 즐길 수밖에.”
영화에서 오인모는 ‘망한’ 영화감독이자, 아내와 이혼으로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 형(윤제문), 동생(공효진)과도 눈만 마주치면 티격태격한다. 그 아귀다툼 속에서도 두꺼운 책 한 권을 쥔 채 ‘허세’를 부린다. 바로 여기서 박해일의 능청스러운 연기력이 힘을 발휘한다.
“그 책, 알고 보면 ‘노인과 바다’다. 하하! 허세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디든 그런 사람 꼭 있잖나. 다분히 일상적인 모습에서 출발하려 했다. 그게 이 영화에 필요한 정서 같았다.”
지난해 주연한 ‘은교’에 이어 또 다시 소설 원작의 영화에 참여한 박해일은 여러 조건을 짚기보다 ‘고령화가족’ 연출자의 이름만 봤다. ‘파이란’으로 유명한 송해성 감독이다.
“‘파이란’은 내게 한 연출가를 동경하게 만든 영화다. 과연 ‘고령화가족’은 어떨까…. 기대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배우에게 늘 잘 맞는 옷을 입혀준 감독을 믿었다. 그 기대가 이번에도 통했다.”
박해일이 요즘 가장 많이 대화하는 사람은 송해성 감독 그리고 함께 출연한 윤제문이다.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고 묻자, 박해일은 어딜 가든 매고 다니는 백팩 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보였다.
며칠 전 송 감독이 툭 던져주며 읽어보라고 했다는 책의 제목은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잘 나가던 컨설턴트가 실수로 직업을 잃고 고급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일을 하며 겪는 이야기다. ‘다독가’이기도 한 박해일이 ‘은교’와 ‘고령화가족’을 연속해 택한 건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였다.
윤제문과는 주로 술잔을 기울인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던 10여 년 전부터 친분을 나눈 이들은 이번에 제대로 시너지를 냈다. 둘 다 술을 즐기는 덕분에 요즘엔 마주앉을 기회가 더 많다. 박해일은 “결국 사람이니까”라고 했다.
“어쨌든 사람을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니 술자리가 정말 소중하다. 그 안에서 일도 찾고 얘기거리도 만드니까. 또 나란 배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고령화가족’ 개봉을 준비하며 박해일은 자신의 실제 가족에 대한 질문도 자주 받는다.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아들이자 남편이라고 그는 말한다. 다섯 살 많은 누나와도 특별할 것 없는 남매다.
“어릴 땐 나이차이가 있어서인지 누님이 때론 부모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말을 잘 듣기도 했고, 안 듣기도 했고.(웃음) 내 머리가 큰 뒤론 누님과 의견이 나뉠 때도 있었다. 지금? 각자의 인생을 존중하며 안부를 묻고 지낸다. 그저 평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