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 시간) 프랑스 휴양도시 칸에서 폐막한 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은 튀니지 출신 프랑스 감독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블루 이즈 더 워미스트 컬러’에 돌아갔다. 칸영화제는 무명에 가까운 감독이 연출한 파격적인 소재의 작품에 1등상을 주며 할리우드의 아카데미와 차별화해 예술 영화제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블루 이즈…’는 상영 전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케시시 감독은 이번이 칸영화제 첫 본선 진출이었다. 더구나 영화는 15세 소녀와 성인 여성 간의 파격적인 동성애를 담고 있다.
하지만 23일 영화가 공식 상영된 뒤부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 영화잡지 스크린의 일일 소식지 격인 스크린데일리 평점에서 영화는 평점 4점 만점에 3.6점을 받았다. 각국의 영화담당 기자들이 참여하는 평점에서 3.6점은 이례적으로 높은 점수다. 프랑스 잡지 ‘르 필름 프랑세즈’에서는 평론가 15명 중 11명이 만점인 4점을 줬다.
영화의 주연배우 레아 세두와 신인 아델 엑사르코풀로스가 선보인 과감한 베드신은 뛰어난 미장센으로 영화제 후반 큰 화제가 됐다. 올해 심사위원장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 영화는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며 “깊이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우리를 시간이 멈춘 듯한 세계로 인도한다”고 평했다. 케시시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아랍의 민주화 열풍을 언급하며 “아랍의 봄이 우리에게 자유와 자유로운 사랑에 대해 영감을 줬다”며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튀니지에서 영화를 개봉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아시아 영화도 선전했다. 섬세한 드라마가 돋보인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의 ‘라이크 파더, 라이크 선’은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2004년 ‘아무도 모른다’로 이 영화제에서 당시 14세 배우 야기라 유야에게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안긴 바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배두나가 출연한 ‘공기인형’ 연출자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데뷔한 중국 6세대 감독의 대표주자 자장커(賈樟柯) 감독은 ‘어 터치 오브 신’으로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스크린데일리 평점 3점을 받아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자 감독은 200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스틸 라이프’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탄 바 있다.
저항과 반역을 표방했던 중국 5세대 감독들과 달리 자 감독은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상의 변화에 주목해왔다. 화려한 화면에 담긴 산업화에 휩쓸린 소시민의 풍경이 자 감독 영화의 트레이드마크다.
아시아 영화의 강세는 심사위원 구성에서부터 예고됐다. 심사위원 9명 중 아시아 출신은 대만의 거장 리안 감독을 비롯해 일본 감독 가와세 나오미, 인도 여배우 비디아 발란 등 3명이다.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상상력 고갈에 시달리는 유럽 영화제들이 아시아에서 새로운 영감을 찾고 있다. 우리 영화도 앞으로 계속 주목을 받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2등상 격인 심사위원대상은 조엘, 이선 코언 형제 감독의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에 돌아갔다. 감독상은 ‘헬리’를 연출한 멕시코 출신 아마트 에스칼란테 감독이 차지했다. 여우주연상은 ‘더 패스트’의 베레니세 베호, 남우주연상은 ‘네브래스카’의 브루스 던이 수상했다.
▼ 30세 신예가 한국영화의 자존심 지켰다 ▼ 문병곤 감독 ‘세이프’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 수상
문병곤 감독(30)의 ‘세이프’가 칸영화제에서 단편부문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가 칸영화제 단편부문에서 1등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1999년 이 영화제 단편부문에서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이 지금까지 최고 성과다.
13분 분량인 ‘세이프’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불법 사행성 게임장 환전소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여대생. 그가 가불금을 갚기 위해 사람들이 환전을 요구하는 돈의 일부를 몰래 빼돌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여대생은 환전소라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상황은 오히려 그가 예상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문 감독은 지난해 9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택가의 한 지하 주차장을 빌려 나흘 만에 영화를 찍었다. 3.3m² 남짓한 컨테이너를 게임장 환전소로 꾸몄는데, 이 공간이 영화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의 전부다. 제작비는 800만 원. 신영균문화재단 후원 공모에서 발탁돼 받은 500만 원에 자비 300만 원을 보탰다.
단편 심사위원장인 제인 캠피언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긴장감 있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메시지도 힘이 있고 미술이 뛰어나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문 감독은 2011년 중앙대 졸업 작품인 단편 ‘불멸의 사나이’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은 데 이어 두 번째 만에 세계 최고 영화제에서 ‘일’을 냈다.
그는 2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돈을 벌어 얼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록 직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보며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또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를 담은 영화다.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영화를 찍어도 관객이 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한국 독립영화는 올해 초 ‘지슬’이 독립영화계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이어 또 한 번 경사를 맞았다. 제주도 4·3사건을 유머와 아름다운 화면으로 그려 낸 ‘지슬’은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이 영화제에서 1등상을 차지했다. ‘지슬’은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3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2월 베를린영화제에는 단돈 300만 원으로 만든 이돈구 감독의 ‘가시꽃’이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돼 주목을 받았다. 이 감독은 때밀이 보조 아르바이트로 제작비를 마련했다고 밝혀 화제가 된 바 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독립영화는 한국영화계에서 상상력의 못자리 같은 존재다.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이 상업 영화를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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