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씻고 소파에 누워 있는 찬식이의 발 쪽에,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길이가 길어서 다리를 구부리고 있는 게 불편한 건지 몸을 일으키더니 내 손을 잡아 이끌어 다시 누워 버렸다. 그 힘에 못 이겨 찬식이 위로 보기 좋게 엎어졌고, 찬식이 얼굴이 미세한 간격을 두고 코앞에 있었다. 뭐 하려는 거지. 뜨거운 숨결이 닿고 있는데, 서로에게 닿고 있는데 찬식이는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나만 긴장한 건가.’
요즘 인기몰이 중인 남성 아이돌 그룹 B1A4를 등장시킨 ‘팬픽’의 일부다. 팬픽은 팬들이 가수를 주요 등장인물로 설정해 쓰는 소설이다. 팬과 픽션을 합성한 말이다. 앞에 소개한 팬픽에 등장하는 ‘찬식’은 B1A4의 멤버인 ‘공찬’을 염두에 두고 만든 가상의 캐릭터다. 팬들 사이에서 공찬은 주로 본명인 (공)찬식이라고 불린다.
남자 아이돌 그룹을 소재로 한 팬픽 가운데는 동성 멤버 간의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아슬아슬하게 표현한 글이 많다. 팬들은 활자를 통해 멤버들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대리 충족하는 동시에, 좋아하는 가수가 동성애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그 가수가 다른 이성(팬의 동성)과 교제하는 상황에 대한 ‘공포’에서 도피해 위안을 찾는다.
이처럼 요즘 팬들은 가수가 생산하는 문화를 향유하는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열광하는 그룹 멤버를 등장시킨 스토리를 만들어 공유하고 전파한다.
#2. 지난달 27일부터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세텍(SETEC)에서 열린 남성 그룹 JYJ의 팬 행사인 멤버십 위크에는 나흘간 1만7000명이 몰려들었다. 직장인 한사랑(가명·41·여) 씨도 멤버십 위크에 다녀왔다. 열성 팬인 한 씨는 JYJ의 모든 콘서트 티켓과 음반을 구입한다. 하지만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일주일에 7일, 24시간 JYJ를 소비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팬 커뮤니티 게시판 글과 팬아트(fan art·팬이 가수를 모델로 생산해내는 애니메이션이나 일러스트, 실물 예술품)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는 JYJ의 패러디물을 잘 만드는 유튜브 사용자를 팔로한다. 팬들이 제작한 영상 모음집, 달력, 반창고도 산다. JYJ를 ‘서포트’하기 위한 팬들의 자발적인 홍보자금 모금에도 참여한다. 한 씨는 “요즘 팬은 가수나 기획사가 만드는 콘텐츠보다 팬들이 만드는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한다”며 “언제부턴가 가수에 대한 애정보다 ‘팬질’ 하는 재미가 더 커진 것 같다”고 했다. ▼ 팬픽-팬아트 퍼뜨려… 팬이 문화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
가수가 있어 존재하는 팬 → 가수를 존재하게 하는 팬
세계에서 주목하는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그 물결을 일으키는 동력은 팬픽을 생산하고 팬아트를 소비하는 팬들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음반시장이 몰락하면서 가수의 팬덤은 음반과 공연 입장권 구입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주 수익원이 됐다. 2010년대 들어 케이팝의 외연이 세계로 넓어지고 본토(한국) 팬덤의 활동이 인터넷과 유튜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뻗어나가면서 그 자체로 투자 액수도, 경제 효과도 계측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홍보창구가 돼가고 있다.
‘공부는 안 하고 오빠나 쫓아다니는 빠순이들’로 폄하되던 팬덤은 가수와 가요 기획사의 존폐까지 좌우하는 큰 세력이 됐다. 김주옥 씨(미국 템플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박사과정)는 한류산업의 성장에서 팬덤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진단했다. “팬덤은 음반산업을 굴리는 실질적인 축이 됐다. 팬들은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순위를 높이기 위해 비합리적 소비까지 한다. 이런 경쟁은 낮은 시청률에도 지상파의 음악 순위 프로를 유지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국내 팬덤의 격돌이 해외 팬덤의 이목을 끌고, 이것이 순위 프로를 유지시키며 ‘가요 판’을 떠 있게 하는 것이다.
소비하는 팬 → 생산하는 팬
팬덤과 가수의 공생은 생산자-소비자의 뻔한 도식을 벗어났다. 팬은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 생산자로 변신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대중화,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발달이 이런 변화를 이끌었다.
대표적인 게 팬픽이다. 팬픽이 올라오는 인터넷 카페는 수만∼수십만 명의 회원 수를 자랑한다. 매일 다양한 가수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작품이 올라온다. 국내 팬픽의 역사는 1996년 그룹 H.O.T.의 데뷔와 함께 시작됐다.
‘잉여’(잉여인간·생산성 없는 인터넷 글 놀이에 빠진 누리꾼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들의 하위문화라 치부되던 팬픽의 몸값은 최근 크게 올랐다. 유료 구독자를 확보해 돈을 버는 유명 팬픽 작가의 얘기만이 아니다. 일부 신생 및 중소 기획사에 팬픽은 팬덤을 확장시키는 도구로 이용된다. 연간 수십 개의 그룹이 데뷔하는 아이돌 춘추전국시대라서 그렇다. 제한된 방송출연, 대중노출 속에서 팬덤을 북돋우고 유지하려면 중독성 강한 ‘역사’가 필요하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신생 아이돌 기획사 중 일부는 ‘그림이 나오는’ 동성 멤버 A와 B에게 ‘사무실에 나올 때 둘이 꼭 붙어서 이동하라’고 은밀히 지시한다. 팬들에게 팬픽의 소재를 제공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귀띔했다.
팬아트는 수익을 목표로 제작되지는 않지만 팬덤의 결집력을 강화해 잠재적 소비층을 늘리는 역할을 한다. ‘팬싸’(팬 사인회)나 ‘공방’(공개방송)이 열리면 행사가 종료된 지 몇 시간 내에 ‘대포여신’들의 ‘직찍’(팬이 찍은 가수의 사진)과 ‘직캠’(팬이 찍은 가수의 영상)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진원지로 SNS를 타고 전 세계에 퍼져 나간다. 이런 2차 저작물은 초상권에 위배되는 콘텐츠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소속사의 엄격한 간섭을 받지 않는다. 소속사에서 배포한 공식 사진을 짜깁기하거나 패러디해 유튜브와 게시판에 올리는 이도 팬들이다.
팬아트는 팔리기도 한다. 일부 팬이 직찍이나 ‘짤방’(잘림 방지의 준말·팬 커뮤니티 게시판 글에 첨부하는 가수의 사진이나 영상 파일)을 모아 책 형태로 만든 포토북이나, 가수의 데뷔 때부터 최근까지의 주요 영상을 모은 DVD는 1만5000∼3만 원의 가격에 다른 팬들에게 판매된다. 기획사들은 팬픽이나 팬아트, 커뮤니티 내 게시 글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함으로써 팬덤의 동향을 살피고 아이돌그룹의 다음 앨범에 담을 이미지와 음악 장르를 정하는 데 참고한다.
정치를 닮아가는 팬덤1-색깔론
팬덤이 움직이는 모습은 정치판과 닮았다. 하나의 팬덤은 다른 팬덤과 경쟁하며 세력다툼을 벌인다. 팬덤의 정치가 오프라인에서 충돌하는 지점은 드림콘서트나 소속 가수의 합동 콘서트다.
드림콘서트는 한국연예제작자협회가 1995년부터 주최해온 공연이다. 매년 10대들이 좋아하는 스타 가수를 초청한다. 팬클럽에는 다른 팬클럽에 대항해 세를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2008년까지는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2009년부터 올해까지는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여러 팬클럽의 수많은 회원이 결집하는 만큼 많은 객석이 필요한 콘서트다.
‘색깔’은 이런 대형 팬덤의 충돌에서 중요한 화두다. 팬덤의 상징 색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이다. 팬클럽마다 자신이 응원하는 가수를 상징하는 색의 풍선이나 응원봉을 들면서 시작된다. 응원 색의 원조 격은 H.O.T.의 펄 화이트, 신화의 주황, 젝스키스의 노랑, god의 하늘색.
1세대 아이돌 등장 이후 기술의 발달(응원의 주 도구가 풍선에서 발광봉으로 이행)과 아이돌 그룹의 수적 증가 및 경쟁의 심화로 펄, 파스텔이 끼어든 오묘한 색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생 팬클럽과 기획사는 전문 디자이너나 알 만한 색상표를 들여다보며 ‘우리 아이돌 색깔 정하기’에 골몰한다. 무지개색을 포함해 수십 가지 색상이 이미 점유돼 있다 보니 충돌도 발생한다. 2NE1이 데뷔한 2009년 블랙잭(2NE1 팬클럽)이 응원 색을 ‘핫핑크 로즈’로 정하자 소원(소녀시대 팬클럽) 내 일부 팬은 “색상이 소녀시대의 파스텔 로즈 하트와 너무 비슷하다”며 들고 일어났다. ▼ “염탐꾼 걸러내야” 팬클럽 가입시험도▼
B.A.P의 ‘스프링 그린’과 샤이니의 ‘펄 아쿠아 그린’은 색상코드로는 각각 #00ff7f와 #79e5cb로 다르지만 육안으로는 구분이 힘들다. 최근 인기가 상승 중인 한 신인그룹의 소속사 관계자는 “앞으로 응원이 필요한 큰 무대에 자주 서게 될 텐데 다른 그룹들이 색상표 상의 색을 너무 촘촘히 점하고 있어 고민”이라며 “순백색을 택하는 안도 고려 중”이라고 했다.
정치를 닮아가는 팬덤2-조직
가수의 소속사가 정당의 본부라면 팬클럽이나 사설 팬사이트는 지구당처럼 기능한다. 최다 회원수의 인터넷 팬카페나 공홈(공식 홈페이지)에 가수와 관련한 공지사항이 올라오면 다양한 팬 커뮤니티에 이 내용이 전달된다. 최근 팬덤의 세계를 취재해 정리한 책 ‘팬덤이거나 빠순이거나’(알마)를 출간한 이민희 대중음악평론가는 “팬들은 여론이나 세상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배척해야 하는지, 분란을 어떻게 예측하고 만드는지를 안다. 팬질은 곧 정치질이다”라고 했다.
“팬덤의 양상을 살펴보면 영호남향우회나 노사모와 큰 차이가 없다. 서로 다른 가수의 지지자를 대외적으로 깎아내리는 동시에 내부적 투쟁도 치열히 이뤄진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팬덤과 경쟁하는 한편으로 그들 내부에서는 권력과 추종세력이 형성된다. 고화질의 직찍이나 팬픽을 잘 생산하거나, 가수의 측근이나 소속사 관계자를 연줄로 둔 이들은 팬덤 내에서 부러움, 때로는 우러름까지 받는다.”
팬덤 구성원의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실제로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도 늘었다. 2009년 불거진 동방신기와 JYJ의 법적 다툼에서 양측 팬들은 소송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커뮤니티에 중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의 법적 취약점, 향후 팬덤과 소속사의 대응방안까지 자세하게 분석해 그 내용을 공유했다. 이 평론가는 “실제로 카시오페아(동방신기 팬클럽) 내에 법조인 친척을 둔 팬이 이를 지휘했다는 설도 있다. 다양한 인맥을 동원해 여러 일을 해결한다. 가수들 이미지를 위한 팬들의 자원봉사 활동이 신속,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도 팬덤 내에 진짜 봉사단체 관계자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반면 온라인상에 누구나 팬 카페를 개설할 수 있게 되면서 팬클럽의 파편화 및 약화도 진행됐다. 1세대 아이돌 시절 서울지부장, 인천지부장 식으로 전국적 조직체계를 갖고 강한 결집력을 과시했던 오프라인 팬덤은 위축됐다. 그 대신에 대표 팬 카페나 소속사 공식 멤버십 팬클럽의 임원들이 가수 소속사의 직원과 협업한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팬클럽 회장의 역할을 기획사 내 팬 매니저나 팬 마케팅 담당자가 대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동반자 관계에 가까워졌다”고 했다.
전역을 앞둔 가수 비의 소속사는 최근 가수의 ‘전역식’을 어떻게 진행할지 논의하기 위해 팬 카페 임원과 ‘상견례’ 자리를 마련했다. 대형기획사 I의 팬 마케팅 팀 직원인 K 씨는 “콘서트 중간의 팬 이벤트를 위해 공연 큐시트를 조정하는 작업부터 조공물품 선택, 응원도구 디자인과 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팬클럽 임원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원 선거’도 치열하다. 몇 년 전 신화 팬클럽 ‘신화창조’의 한 지역 회장을 지낸 D 씨는 “당시 전국회장과 부회장, 지역별 임원을 인터넷 투표로 뽑았다. 출마자는 자신의 활동 경력과 공약을 내건다. ‘올해는 확실히 팬미팅을 개최하겠다’ ‘기획사와 논의해 연 3회의 팬 사인회를 성사시키겠다’ 같은 공약이 단골로 등장했다”고 전했다. ‘입당’도 쉽지 않다. 대부분의 팬 카페는 주요 가입 절차로 퀴즈 풀이를 내세운다. 문제의 난도가 최상급이다. 예를 들어 ‘멤버 A가 2012년 5월 7일 B방송의 C프로그램에 나와 D의 질문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묻는 식이다. 대형기획사 G의 관계자는 “해당 가수의 소속사 직원조차 풀기 힘든 문제가 많다. 아마 나도 가입이 힘들 것”이라고 했다. 진입장벽은 높을수록 좋다. 가입자의 충성도를 평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장벽은 경쟁 가수 팬클럽의 ‘잠입’과 ‘염탐’을 막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케이팝 인력 양성소, 팬덤
팬덤은 케이팝 산업의 인력 양성소 역할도 한다. 한 대형기획사 홍보팀 관계자는 “사내 인력의 10% 정도는 팬클럽 활동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팬덤과 가요계에 대한 이해가 깊은 팬클럽 출신들은 특히 팬을 관리하는 팬 마케팅 부서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 중소 아이돌 기획사 관계자는 “팬 매니저(팬 관리 매니저) 채용 시 팬클럽 임원은 사실상 가산점을 받는다. 팬클럽 임원에 대한 사실상의 ‘특채’도 없는 것은 아니다. H.O.T.나 신화 같은 1세대 아이돌 팬클럽 임원 상당수는 가요계 전반에 퍼져 신생 아이돌의 팬 마케팅 전략을 짜고 있다”고 귀띔했다.
팬덤 취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기획사와 팬 모두 실명이나 소속 밝히기를 극도로 꺼린다는 점이었다. 취재 요청을 고사한 한 대형가수 팬클럽 임원은 “아무리 좋은 내용으로 인터뷰를 하더라도 다른 팬들로부터 ‘네가 뭔데 대표성을 띠느냐’ ‘이 부분은 왜 이렇게 얘기했느냐’는 질타를 피할 길이 없다. 두렵다”고 했다.
팬덤에 접근하는 기획사의 태도도 매우 조심스럽다. 한 대형기획사 홍보팀 관계자는 “팬들은 기획사나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기획사의 역할보다 팬덤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것도 우려된다”고 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팬덤은 가요계가 아이돌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산업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왔고 배타성과 세력화 경향이 강해졌다”면서 “아이돌 중심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는 단단하게 블록화된 팬덤의 힘이 계속해서 산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팬덤(fandom) :: 팬(fan) 집단과 그 문화를 아울러 이르는 말. 팬에 상태나 정신을 뜻하는 접미사 ‘-dom’이 붙어 만들어졌다. ‘왕국(kingdom)’이 결합됐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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