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팬덤 단어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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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 정색하면 곤란하다. 그들의 용어에 담긴 풍자와 해학, 압축과 자조(自嘲)의 미를 이해하거나 포용하지 못하면 자칫 ‘진지병자’로 몰릴 수도 있다. 팬덤에서 주로 쓰이는 은어를 사전 식으로 풀었다. 팬덤별로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지만 팬덤을 넘나들며 통용되는 단어를 추렸다. 초보 팬은 이런 용어를 모르면 ‘팬질’에 심대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주요 팬 커뮤니티마다 이런 용어사전을 제작해 온라인 게시판에 공지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것을 ‘단어장’이라 부른다. (예문: 샤이니 단어장에 이거 추가해야겠네.)

팬질=팬심(팬 된 마음)으로 추동되는 일련의 활동. (예문: 팬질 시작. 팬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비슷한 말: 덕질, 덕심.

오덕=한 분야에 집중하는 사람인 오타쿠의 변형된 준말. 덕후로 변형하거나 덕으로 줄이는 게 보통.

빠순이=‘오빠’를 추종하는 여성. 팬덤 밖에 있는 이가 팬을 얕잡아 부를 때 주로 쓰임. 팬덤에서는 ‘빠’로 경량화, 중성화하거나 우아한 어감의 ‘퐈슨’으로 순화하기도 함. cf. 퐈슨심(절절한 팬심) (예문: 니가 아무리 빠순이라 불러도 내 퐈슨심은 철철 넘치는군화.)

머글=팬심이 없으며, 따라서 팬질도 하지 않는 일반인. ‘해리포터’에서 마법사들이 일반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에서 유래. 특별한 적의도 없고 팬이 실제로 우월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 종족이라는 절대적 자부심이 투영돼 있지는 않음. 다만, 심장에 팬심을 장착하지 못한 이들에게선 나올 수 없는 팬들의 결집력과 희생력, 실행력이 가히 마법사급이라는 자존감이 내재돼 있음. (예문: 머글들이 하는 얘기에 넘 신경쓰지 마삼.)

cf. 진지병자: 팬심 가득한 글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해석해 꾸짖는 이들을 팬이 가리키는 말. 진지병자는 대개 머글이지만 팬덤 내부에서 말 그대로 지나치게 진지한 이들이거나 초보 팬인 경우도 있음.

사생=사생활을 캐는 팬. 안방순이의 대척점에서 파파라치에 가깝게 가수의 일상을 파고드는 극렬 팬. 다수의 팬덤에서는 ‘불가촉천민’으로까지 불리며 배척당함. 사생임이 밝혀지면 팬들 사이에서 퇴출되기도. 빠르게 이동하는 가수를 추적하기 위해 사택(사생 택시)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 (예문: 나, 사생 아냐.)

안방순이=머글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오프라인 활동 없이 TV 시청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만으로 가수를 응원하는 팬. (예문: 전 안방순이에 불과한 걸요.)

월도, 등도, 급도=월급 도둑, 등록금 도둑, 급식 도둑의 준말. 차례로 직장인 팬, 대학생 팬, 중고생 팬을 가리킴. 일과시간의 많은 부분을 팬질에 보내는 모습에서 착안한 용어. (예문: 너 생각보다 동안이구나. 급도인 줄 알았더니 등도네.)


반도녀, 섬녀, 대륙녀=각각 한국 팬, 일본 팬, 중국 팬. 행동거지가 바람직한 경우 높임말인 섬언니, 대륙언니로 일컫기도 함. 케이팝 팬덤이 해외로 뻗어나가며 한국에서 열리는 행사에 섬녀(위 사진)와 대륙녀의 참여율이 높아졌고 반도녀를 포함한 세 국가 팬의 동선이 얽히게 됨. 일각에서는 반도의 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섬녀나 대륙녀가 벌이는 적극적인 팬질의 양태를 성토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음. (예문: 어제 단콘(가수의 단독 콘서트) 갔는데 섬언니, 대륙언니들에 둘러싸여 힘들어씀. ㅠㅠ)

새우젓(새우잦)=팬이 스스로를 자조하며 일컫는 말. 가수가 무대에서 객석을 보면 팬들이 새우젓처럼 보일 거라는 추정에서 나옴. 팬에게 가수는 하나이지만, 가수에게 팬은 무한히 많아서 개체를 일일이 인지하고 존중해 주기 힘들 정도라는 의미. 새우잦으로 변형돼 쓰이기도. (예문: 우리 새우잦들은 그저 팬아트나 보며 놀아야지.)

대포녀, 대포여신=대포처럼 크고 긴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가수의 사진을 찍는 팬. 대개 공방(공개방송) 현장에 나타나 촬영을 하며 다른 팬들에게 손수 만든 직찍(직접 찍은 사진)과 직캠(직접 찍은 동영상)을 제공. 기획사의 공식 사진 촬영 직원이 대포녀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음. 가수를 유달리 더 매력적으로 촬영하는 직원의 경우, 팬들에게서 ‘이 언니, 빠순 렌즈(빠순이의 팬심이 담긴 정성어린 촬영 자세를 카메라 부품에 빗댄 말)라도 장착한 듯’이란 감탄사를 이끌어 내기도 함. 대포녀 가운데서도 백통렌즈(스포츠 사진 기자들이 주로 쓰는 커다란 흰 망원렌즈)를 사용하는 이들은 더욱 경외의 대상이 됨. 팬의 세계에서는 아이돌 그룹 멤버의 열애설 보도 직후가 고가의 DSLR 카메라를 저가에 구입할 적기라는 조언도 떠돎. 대포여신들이 일제히 팬질을 그만두게 돼 중고 카메라 시장에 매물이 넘칠 정도라는 뜻.

트위터봇, 카톡봇=트위터봇은 팬이 스타를 가장해 운영하는 트위터 계정, 카톡봇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카카오톡 계정. 팬들은 봇과 대화하며 스타와 말하는 듯한 대리 만족을 느낌. 봇주(계정 운영자)는 봇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스타에 대한 정보와 말투를 숙지해야 함. 때로 연예인봇은 사칭 문제도 생겨 일부 팬클럽에서는 ‘봇 생성기간’을 정하고 시험을 통해 공인된 봇을 선발.


조공=팬이 가수에게 주는 선물. 대개 가수의 새 음반 발표나 활동 재개, 대형 콘서트 개최에 맞춰 이뤄지지만 개별적인 선물을 가리키는 수시 조공도 있음. 가수와 스태프를 위한 도시락 조공, 콘서트나 행사장에 기부용 쌀 포대와 화환을 가져다 놓는 쌀 조공이 기본. 부유한 팬은 명품 가방, 노트북 컴퓨터, 자동차를 조공품에 올리기도.

일코=일반인 코스프레의 준말. 코스튬 플레이를 하듯 일반인(머글)을 가장하고 있다는 뜻. 개인용 PC나 스마트폰의 배경화면을 가족이나 풍경 사진으로 설정하고 팬질은 일과시간 이외에 하는 것 등이 있음. (예문: 내 동생, 2년 동안 일코하다 오늘 나한테 딱 걸림. ㅋㅋ)

일코해제=일반인 코스프레 해제의 준말. 자신이 특정 가수의 팬(빠)이라는 정체성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상황을 가리킴. 예를 들어, 온라인으로 주문한 가수의 브로마이드나 음반이 사무실에 배달되다 사고로 사내 구성원 앞에서 내용물이 개봉되거나, 우연히 빌려 준 노트북에 고이 저장해 놓은 가수의 사진 폴더가 동료에게 발각되면 일코해제를 당하게 됨. 가수의 새 화보 발표일에 같은 사무실로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택배가 일제히 배달되면서 여러 구성원이 동반 일코해제당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 일코해제 경험을 기술한 ‘강제 일코해제 후기’ 같은 글은 흥미로운 콘텐츠로 사랑받음. (예문: 나 오늘 엄마한테 일코해제. TV에 나온 XX 얘기하다 낼모레 걔 생일인 거까지 무의식중에 말함. ㅠㅠ)

짤방=짤림(잘림) 방지의 준말. 팬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쓰며 자신의 글을 자르지(안 읽고 건너뛰지) 못하도록 시선 끌기 용도로 첨부하는 사진이나 영상.

악개=악성 개인 팬의 준말. 아이돌 그룹 멤버 중 유독 한 멤버에만 열광하는 팬을 그룹 전체를 사랑하는 팬이 얕잡아 이르는 말. 그룹은 물론 팬덤의 안녕에도 해악을 끼치는 이들로 간주돼 배척되기도. (예문: 악개들 고나리(관리)하기도 지쳤다.)

입구=특정 가수에게 반해 팬덤과 팬질의 세계로 들어서게 만든 계기나 순간. (예문: A-너는 입구가 뭐야? B-나? 2013년 7월 6일 음중(MBC TV ‘쇼! 음악중심’))

출구=특정 가수에게 실망해 팬덤에서 나가게 된 계기나 순간. 가수의 열애설은 대표적인 출구. (예문: 출구 제대로 열어 주네.)

<격언>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한번 팬질의 재미에 빠지면 헤어날 수 없음. 팬질을 쉬거나 좋아하는 가수를 갈아타긴 하지만 결코 팬질을 멈추지는 못한다는 뜻. ‘입구는 가수의 매력이지만 정작 팬이 중독되는 대상은 팬질 그 자체’라는 교훈이 담긴 ‘격언’.

임희윤·구가인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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