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의 팜 파탈 록시 역을 맡은 이하늬는 “표현 수위가 워낙 높은 작품이라 배우가 얼마나 발산할지는오롯이 관객에게 달렸다”며 “마음 확 열어젖히고 화끈하게 달려 보자”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넌 너무 야해.”
열다섯 살에 들었던 어머니 말씀. 배우 이하늬(30)는 그때부터 무대와 카메라 프레임을 벗어난 일상에서는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절대 입지 않는다. 남성들에게는 더없이 불행한 일이다.
‘금발이 너무해’ 이후 3년 만의 뮤지컬 복귀작인 ‘시카고’는 모든 배우의 기본 의상이 란제리다. 하지만 눈과 귀를 붙드는 것은 주인공 록시 하트(이하늬)의 몸매가 아니라 에너지 넘치는 표정과 몸짓, 시종 안정적이면서도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노래다.
공연 첫날 인터미션 중 뒤따라 나오던 남성 관객의 말. “TV로는 몰랐는데… 연기도 노래도 정말 대단하네. 몰랐어.” TV에 온전히 담기 어려워 몰랐던 배우 이하늬를 5일 오후 만났다.
―드라마 ‘상어’도 한창 촬영 중일 텐데, 정신없겠다.
“카메라 앞에서 머릿속에 자꾸 록시가 나타났다. 지금은 가위로 자르듯 없애버리지만 초반엔 심했다. 노래가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정신병처럼. ‘연습 때 왜 그것밖에 못했을까. 더 잘 부르려면 어떡해야 하지….’ 두 캐릭터를 동시에 담는 상황, 앞으로는 피하고 싶다.”
―스스로에게 가혹한 스타일인 듯.
“일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남들 인정보다 내 판단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나 자신을 좀더 사랑해주려 한다. 너무 괴롭히다 보니 ‘평생 이 일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우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박수 받고 돈까지 벌 수 있다니’ 했던 초심이, 스스로 들볶다 흔들렸다.”
―명문대(서울대 음대) 출신 미스코리아 진, 딱 ‘엄친딸’ 이미지다.
“내용보다 형식이 큰 건 뭐든 정말 별로다. ‘스펙’ 좋은데 알맹이 휑한 사람 허다하지 않나. 대중에 처음 알려진 미스코리아 타이틀은 실제 나에 비해 너무 화려하고 크다. ‘아 저 사람 평생 배우로 살려 하는구나.’ 그런 시선을 얻고 싶은데…. 시간이 좀더 쌓여야겠지.”
―포털 사이트 연관 검색어는 여전히 몸매 관련 단어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섹시하다’가 핸디캡이었다. 겉을 둘러싼 것에 대한 관심만 불거질 때마다 좌절감이 든다. 여배우로서 물론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이슈를 깨는 건 내 과제다.”
―‘힘들어서 연기 못 하겠다’ 생각한 적은 없나.
“단 한 번도. 무대에서 자라서 그 위가 제일 편하다. 네 살 때부터 어머니(문재숙 이화여대 교수), 언니와 가야금 공연을 했다. 철들고 처음 데뷔했을 때와 달라진 건 관객들이 얼마나 큰 시간과 노력을 희생해 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된 거다. 그게 왜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내가 무대를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 일을 하면서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세상에 무대만큼 정직한 곳이 없다. 얼마나 연습했는지는 물론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숨길 수 없다. 그대로 다 드러난다.”
―‘이하늬의 록시’를 어떻게 봐주길 원하나.
“나는 커리어 시작이 뮤지컬 배우가 아니었다. 계산해서 연기하기는 무리다. 어차피 뭘 하든 이하늬라는 사람이 묻어난다. ‘지금 이건 진짜 내 상황이다. 어떡할래?’ 그게 지금 찾을 수 있는 정직한 답이다. 팬들이 같은 뮤지컬을 여러 번 보는 까닭, 배우가 한 뮤지컬을 10년 넘게 할 수 있는 까닭도 같은 맥락 아닐까. 무대는 매 순간이 한없이 새롭다. 그 새로움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성취다.”
인순이 최정원 성기윤 오진영 출연. 8월 31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4만∼12만 원. 02-577-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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