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는 ‘이해를 초월해 믿게 되는 영화’라고 극찬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인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호들갑을 떤 이 영화. 네 말이 맞아. 이 영화 좀 어려워.
내가 이 영화를 본 느낌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절세미인을 만난 느낌이랄까. 그냥 이유 없이 무릎이 턱 꺾이고 빨려 들어가는 느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배경은 1950년대 미국.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프레디(호아킨 피닉스)는 전쟁 뒤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과격한 행동으로 말썽을 일으키다가 사이비 교주 랭케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먼)를 만나. 교주의 행동대장이 된 프레디는 끝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지.
영화가 어려운 이유를 볼까. 우선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 영화는 대사로 말하는 게 아니라 배우의 몸짓과 영상으로 보여 주는 영화야. 구부정한 허리와 삐딱한 눈빛으로 입만 벌리면 욕을 해 대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보면 영화의 행간이 보여.
영화는 인간 정신의 나약함과 광기에 대한 집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제목처럼 인간은 항상 마스터(절대자)를 찾아 왔지. 살육의 전쟁을 끝낸 프레디가 그 광기를 대체할 다른 대상을 찾는 것처럼 말이야. 그게 사이비 교주야. 프레디는 랭케스터가 사이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는 벗어날 수 없었어. 뭔가 의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전쟁의 광기에 기댔던 나약한 청년은 사이비라는 광기를 다시 마음에 담은 거야.
간혹 대사로 힌트를 주기도 해. 프레디가 미친 ×처럼 마루의 끝과 끝을 오가며 “(여기는)창문이고 난 언제든 나갈 수 있어”라고 내뱉는 대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야. 또 교주를 선전하는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보세요”라고 말하잖아. 정작 자신은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말이야.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은 뒤 문학과 철학계는 실존주의를 말했어. 반면 앤더슨 감독은 전쟁 이후에도 여전한 인간의 광기에 카메라 앵글을 맞춘 것 같아. 영화로 정리한 ‘우리 마음 속 폭력의 역사’라고 할까.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했던 에릭 홉스봄이 두 차례 전쟁을 겪은 이때를 한정해 말했다면 ‘야만의 시대’라고 하지 않았을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