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김광석이 세상에 태어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탄생 50주년의 이름으로 김광석은 세상에 다시 나서고 있다. 이제 쉰 즈음에 들어선 그를 만났다. 묻고 싶은 많은 것들, 하지만 한정된 지면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칫 표피적인 말들 때문에 그의 노래를 추억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이들의 비난을 감수하는 건 아닌지 두렵다. 김광석의 육성이 살아 있는 듯, 작은 진정성이라도 전해진다면 좋겠다.
- 이제 22일이면 딱 쉰 살이시네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허허! 벌써 그런가요?”
- 떠나간 청춘과 사랑을 그리워하며 “매일 이별하며 살”았던 서른 즈음을 지나셨네요. 마흔에는 멋진 할리 데이비슨에 올라 여행하고 싶다 하셨죠? 당신이 그토록 좋아한 무라카미 하루키도 나이 마흔을 앞두고 유럽으로 훌쩍 떠났다던데, 여행은 즐거웠나요?
“다녀왔지요. 돈을 모아 오토바이를 충무로에서 샀거든요. 누구는 내 다리가 (페달에)닿지 않을 거라고 오해하지만, 다 닿습니다. 다리도, 팔도. 문제는 몸무게였는데, 나잇살 덕분일까, 되더군요. 여행이나 사랑이나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 힘들더라도 뭔가 좀 새로운 게 있겠거니 기대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에서 함께한 후배 (안)치환이는 ‘한 몸인 줄 알았더니 아니다/머리를 받친 목이 따로 놀고/어디선가 삐그덕 삐그덕/나라고 믿는 내가 아니다’(마흔즈음)고 노래하던데, 이상과 꿈을 좇다 이젠 현실에 지친 마흔의 언저리에서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기대감을 갖고 싶더군요. 그래서 마흔 즈음에는 그 기대와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지요. 장르도 포크록, 얼터너티브, 블루스, 컨트리 등 다양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 쉰 즈음, 이제 뭘 하실 건가요.
“예전에 친구 (박)학기와 이런 얘기를 나눴지요. 나이 들면 우리끼리 기타 들고 해외에 나가서 공연도 하자고. 얼마 전에 친구들과 후배들이 호주에서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을 하고 왔다던데…. 많은 분들이 우셨다지요? 허허! 그저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노래하고 싶을 뿐이지요.”
- 환갑 때는 연애하고 싶다 하셨는데…. ‘김광석 다시 부르기Ⅱ’에서 부른 ‘바람과 나’의 원곡자 한대수도 나이 60에 새로운 로맨스를 이뤘습니다.
“하하! 축하드릴 일이지요. 로맨스! 그냥 ㄹ자만 들어도 설레지요. 코웃음치지 마시고! 뭐, 그때까지 그렇게 정열이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로맨스는 번개처럼 ‘번쩍’해가지고 정신 못 차려야 되는 거지요.”
- 그러고 보니 부르신 노래에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네요. 특히 이별의 고통스러움과 그 흔적이 남긴 상처들? 사랑이 남긴 상처가 컸나봅니다.
“그러게요. 왜 가고 나서 가슴이 온통 무너진다는 둥, 하늘이 캄캄하다는 둥 하는지…. 있을 때 잘 하세요. 하하! 동물원 때나 1, 2집 때도 그랬고…, 쓸쓸하거나 아니면 좀 나약한 그런 사랑 노래를 많이 부른 것 같아요.”
- 꿈꾸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부치지 않은 편지’를 함께 작업한 백창우의 곡 ‘내 사람이여’를 한창 부르고 다니던 20대 초반,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너의 길을 비춰주겠네/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다면/이름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내 가난한 살과 영혼을 모두 주고 싶네…’라고 노래했지요. 지금이야 그때의 순수함에서 좀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 흠…,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순수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류근 시인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처럼, 사랑을 잃고 새로운 사랑이 다가올 때마다 아프기가 두려워 도망치는 사람도 여럿이더군요. 사실 아프지 않은 사랑은 없겠지요. 사랑은 이렇다 말한 순 없지만…, 사랑은 많은 부분 인정해야 하고, 많은 것을 얻기도 하고 또 잃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아픔으로 더욱 사랑하게 되고. 아픔으로 더욱 괴로운 것…. 혹여 그게 사랑 아닐까요. 아픈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사실은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 어찌 보면 지나간 것, 이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착도 강하셨던 것 같아요.
“이제 막 서른 즈음에 들어선 무렵,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어요. 참 다양한 문화가 살아 숨쉬는 나라더군요. 미니애폴리스라는 곳에는 6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카페도 있어요. 내가 느낀 것을 내 딸 서연이도 똑같이 받아 안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손잡고 함께 찾을 수 있는 문화의 공간이 우리에겐 많이 없는 것 같아요. 그게 안타까울 뿐이죠, 뭐. 사실 ‘다시 부르기’ 앨범도 대학 시절 자주 들르던 카페를 찾아갔다 흔적도 없어진 걸 보고 실망해 당시 즐겨 부르고 듣던 노래를 담아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지요.”
- 노래한 사랑이 꼭 이성을 향한 순정의 마음,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기어이 안아야 하는 사랑만은 아니겠지요. ‘노찾사’나 그 이전 대학연합노래패 ‘메아리’ ‘새벽’ 등에서 불렀던 노래들, 이를테면 ‘녹두꽃’ ‘그루터기’ ‘타는 목마름’ ‘광야에서’ 등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 아닐까요.
“맞아요. 아버지는 늘 제게 ‘사람을 보듬으며 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한때 노래의 힘을 믿었던 때가 있었지요. 뭐, 지금도 그렇지만.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지/처음 잡은 삽자루가 손이 아파서/땀 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니까/나도 몰래 눈에서 눈물이 난다’는 한돌의 ‘못생긴 얼굴’이라는 노래에 충격을 받았어요. 어릴 적 서울 창신동 허름했던 시절도 기억나고. 노래와 음악이 좋아 걷기 시작한 길, 노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저나, 듣는 분들이나 모두가.”
- 그렇게 사람들을 만난 공간은 소극장이었어요. 1000회 공연을 펼치면서 참 많은 이들을 만나셨겠네요. 대단합니다. 가끔은 공연에서 틀리기도 하셨지요.
“보기 싫었나요? 폴 사이먼이 그러더군요. 틀린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음반을 사서 들으라고. 하하! 이런 식으로 날 합리화하고 있나? 1993년 5월5일 공연에선 목감기까지 걸려 고음이 올라가지 않아 창피를 당하기도 했지요. 모두 제 불찰이지요. 그래도 소극장은 참 좋은 공간 같아요. 관객이 빼곡히 들어차서 제 무릎 앞에까지 앉아 노래를 들어주시기도 했는데, (침이) 튀기도 하지요. 어떤 분은 하품을 하다 그만…. 그렇게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누면서 눈빛도 서로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죠.”
- 박학기나 한동준, 김창기, ‘서른 즈음에’를 쓴 강승원 음악감독 등 절친들에 따르면 술도, 사람도 무척이나 좋아하신다더군요.
“그랬죠. 어찌보면 산다는 건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또 혼자임을 깨닫는 것일 수도…. 하지만 나눌 줄도 알아야죠. 나눔을 배워 행복할 거라 믿으며 살고 싶었어요. 원래 통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 사람과 세상에 대한 그런 애정과 애착, 부럽습니다. 음악과 노래에 대한 열정과 고집도 강하시지요? 별명도 많습니다. ‘슈퍼맨’ ‘또해’ ‘휘발유통’ 등등….
“하하! 음…, 슈퍼맨은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의 구경모 PD가 일러줬죠? ‘휘발유통’은 동물원 시절 (김)창기가 붙여준 거고. ‘또해’는 아시다시피 공연을 하고 또 한다 해서 붙은 거지요. 사실 창기와도 많이 싸웠습니다. 사실 제가 좀 욱하는 걸 참지 못하기도 하는데, 노래와 음악에 관한 한 누구에게라도 쉽게 양보하지 못했어요. ‘거리에서’를 부르는 내 보컬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봐요. 그래도 결국은 져 주더군요. 고마울 뿐이지요. 기차 안에서 읽은 김지하 시인의 ‘틈’처럼, 아무도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마음의 문을 꼭꼭 잠가두지 않고 틈을 벌리는 법도 배워봅시다.”
- 고집과 열정은 또 새로움을 낳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요. 공연에선 와인잔을 깨고 나오는 붕어 그림 얘기를 하셨어요.
“뭔가 새로운 것, 새로운 느낌과 경험, 상황은 지금 익숙한 그 틀을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될 거에요. 붕어가 부럽죠, 뭐. 30대 초반엔 새로운 걸 시도하려 했지요. 공부를 빙자한 다른 방식의 생활? 어쨌든 새로운 시도는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이지요.”
- 그 새로움에 대한 열정을 버리신 건 아니죠. 그렇게 믿고 있겠습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노래 중에 ‘다시 돌아온 그대’라는 곡이 있더군요.
“언젠간 꼭 마저 끝내야죠. ‘그대 나를 떠나야 했던 이율 알고 싶진 않아/다시 이렇게 내 곁에 숨 쉬고 있으니/나의 사랑은 영원히 그대의 것이니/우리 이젠 헤어지지 마요/어느새 그댄 내게 사랑이란 이름으로/참았던 눈물 속에 다시 서 있죠.’ 뭐, 이런 노랫말인데…, ‘그대 내게 돌아오리란 믿음을/내 마음 깊은 곳에 간직했었죠’라는 말, 한 번 믿어볼까요? 다 같이?!”
- 공연에선가, 한 여성팬이 “김광석 만세!”라고 외치시더군요. 같은 마음입니다. “김광석 만세!”
“하하하! 그때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얼굴도 빨개졌지요. 그래도 너무 좋고 감사해서 저도 모르게 하하하! 지금처럼 소리 높여 웃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렸죠. 땡큐!”
- 너무 웃지 마셔요. 그 웃음주름이 너무도 그리우니까. …, ….우린 당신의 노래로 위안을 받았지만 정작 당신이 힘들고 외로울 때 아무 것도 해드린 게 없네요.
“흐흐! 어쩌겠습니까. 그러나저러나 제가…, 김광석인데요! 행복하세요!” 김광석은? △1964년 1월22일 대구 출생. 서울 경희중 시절 현악반에서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 악기를 익혔다. △1982년 대광고
졸업, 명지대 경영학과 입학. 대학연합 노래동아리 ‘연합메아리’ 활동. △1985년 입대해 6개월 단기 사병 복무. 복학 뒤
‘노래를 찾는 사람들’ 활동. △1990년 6월 아내 서해순과 결혼해 딸을 낳았다. △1988년 3월∼1995년 8월11일 소극장
1000회 공연 기록. △1996년 1월6일 사망.
● 참고
문헌 및 자료 : ‘김광석 평전-부치지 않은 편지(이윤옥·세창미디어 펴냄)·미처 다 하지 못한-김광석 에세이(예담출판사)·음반
’김광석 노래 이야기‘·’김광석 인생 이야기‘·김광석 인터넷 팬사이트 ‘둥근소리’·‘김광석을 추억하는 이들의 작은 모임터’·네이버
카페 ‘김광석 매니아’·네이버 블로그 ‘타는 목마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