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는 독한 공기가 대지를 뒤덮은 시기에 낮게, 땅에 가깝게 피었다. 누군가는 ‘언더그라운드’라고 했다. 지하에서 솟았지만 절망을 딛고 솟구치는 기백은 세상을 울렸다. 멜로디의 향기는 국화처럼 퍼졌다.
그룹 들국화가 드러머 주찬권의 갑작스러운 별세(지난해 10월) 이후 활동을 멈췄다. 2012년 5월 재결합 소식을 전하며 “계속해 들국화로 행진하겠다”던 이들은 지난해 12월 신곡 7곡이 담긴 27년 만의 신작 ‘들국화’까지 내놨지만 1년 반 만에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둘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전인권을 그가 58년째 살아온 서울 삼청동 자택 부근에서, 최성원을 그가 3년째 터전으로 삼고 있는 제주 서귀포시에서 만났다. 주찬권의 장례식 후 최성원은 제주로 내려갔고 둘은 직접 연락하지 않았다. 해체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었다. 신작에 관한 이야기도.
둘은 “아직 해체에 관해 논의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서로 여전히 좋은 친구”라고 했지만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의 가교 역할을 했던 주찬권의 부재 앞에 망연자실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분간은 개인 활동이나 작곡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주찬권의 1주기인 올 10월에는 ‘들국화’란 이름 아래 두 사람이 한무대에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6일 서울, 7일 서귀포에서 각각 만난 둘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재구성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들국화는 해체된 건가.
▽전인권=해체란 얘기는 해본 적이 없다. 성원이랑 중간에(주찬권 장례식 이후) 본 적도 없고 다툰 적도 없다. 지금은 각자 휴식기를 갖거나 자기 활동을 하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알려져 있다시피 (최성원과의) 사이가 원만하진 않다. 찬권이 거기(장례식장)서 보고 한두 달 안 봤다. 성원이와 만난 3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남다른 정이 있다. 이 세상과 우린 너무 다르다는 공통된, 아주 완전한 생각, 공감대가 있다. (1980년대) 당시 우린 머리가 길었고 ‘빼샥’ 말랐고, 혐오감도 있었다. 그 남다른 정 때문에 또 혹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다시 서로를 찾을 것 같다.
▽최성원=서로 생각하는 중이다. 새 드러머를 영입한다는 건… 숫자적으로 하나가 보충된다고 해서 되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듀엣을 하자니 그것도 좀 웃긴 거고…. 자기 색깔 갖고 음악 하는 것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는 거고… 결론 낸 건 아니다. 우리가 뭐, 원수 졌나. 물론, 만일 찬권이가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신곡을 계속 내려고 했다.
―제주도에 칩거 중인데….
▽최=정식으로 내려온 건 2011년이다. 빌라를 빌려 산다. 내 노래 ‘제주도의 푸른 밤’이 무의식에 각인돼 있었다. 언젠가는 여기서 살게 될 거라는 무의식적인 명령처럼. 아들딸과 와이프는 아직 경기 안양에 산다. 그쪽 집엔 한두 달에 한 번 간다. 모든 창작자는 적막강산이나 절해고도에서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재결성 역시 인권이도 인권이지만 찬권이 땜에 한 이유가 많았거든. 근데 그 찬권이가 없어지니까….(3초쯤 말을 잇지 못하는 최성원의 짙은 안경알 안쪽으로 젖어드는 눈시울이 비쳤다.) 정말 별생각 하고 싶지가 않은 거지. 쉬고 싶은 거다. ―신작 이야기를 듣고 싶다. 주찬권과 듀엣으로 부른 ‘들국화로 必來(필래)’(최성원 작사·작곡)는 유난히 애잔하더라.
▽최=인권이가 한참 힘든 시기를 보낼 때, 2000년대 초반인가 중반인가, 들국화의 인터넷 팬 카페에 들어갔는데 모두들 우리의 귀환을 바라며 닉네임 뒤에 ‘들국화로 必來(필래)’라는 말꼬리를 단 것을 보고 뭉클했다. 우리가 다시 들국화로 분명히 돌아오리라는 바람을 담은 그 여섯 글자를 마음에 담았다. 신곡을 만들면서 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곡을 하나 넣고 싶었다. 작년 6월쯤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어린 들국화를 위해’는 소설가 박민규가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따온 구절이다.
―‘행진’의 느리고 관조적인 변화를 떠올리게 하는 ‘걷고, 걷고’(전인권 작사·작곡)는 어떻게 만든 곡인가.
▽전=작년 2월인가…. 산책하고는 싶은데 날씨가 추워서 엄두가 안 났다. 누워서 이불을 덮은 채로 즉석 노래로 ‘걷고…, 걷고…’를 부르다 나온 거다.
―신작에서 김민기의 ‘친구’를 다시 불렀다. 주찬권에게 바치는 곡인가.
▽전=아니다. 난 이 노랠 엄청난 반항시로 봤다. 가사 중 ‘달리는 기차 바퀴’는 역사를 은유하는 것 아닌가. 찬권이 생전에 녹음했는데 찬권이 가고 다시 녹음했다. 찬권이 생각을 하면서 부르기도 했지만 반항시라는 뿌리는 변하지 않았다.
―2012년 재결합 후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최=작년 6월 경기 성남시 분당중앙공원에서 연 야외공연이다. 날씨도 좋았고 분위기도 참 좋았다. 더구나 찬권이 사는 동네였고. 찬권이….
▽전=분당 공연 때 1만 명 넘는 관객이 몰렸다. 분당 사는 찬권이가 무지하게 신났던 기억이 난다. 우리도 신났다. 관객도 신났고.(이때 전인권과 최성원의 눈시울이 모두 젖었다. 목소리도 먹먹해졌다.)
―요즘 어떤 음악을 듣나.
▽전=친하게 지내는 소설가 박민규가 음악을 추천해주면 유튜브를 통해 듣는다. 엘턴 존, 배드 컴퍼니, 킹 크림슨…. 이런 걸 음악적으로 분석해가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옛날엔 건성으로 따라하고 가사만 외웠는데 이젠 아니다. 한국에선 밴드 ‘게이트 플라워즈’나 정원영, 김광민이 좋다.
▽최=인터넷 라디오로 1960년대 팝과 최신 팝을 듣는다. 나이 들수록 클래식도 좋아지더라. 우리 아버지(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지은 작곡가 최영섭) 영향인가. 가곡을 만들어봤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환갑 지나 다시 한 살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중이다. 한국 팀 중에서는 ‘가을방학’이 정말 좋다.
―(각자) 만들어둔 미공개 곡은 얼마나 되나.
▽최=멜로디만 30곡쯤 된다. 가사를 아직 안 붙였다. 두서없이 곡 스타일이 매일 달라진다. 오래 지나면 모래체로 잔모래가 빠지듯 정제된 것들이 나오겠지.
▽전=확실한 형태를 갖춘 곡은 8개다.
―주찬권은 어떤 음악인이었나.
▽최=자기랑 똑같은 소리를 드럼으로 낸 사람이다. 드럼을 자기화해버린 거다.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기 쉽지 않은 드러머다. 그게 유일하게 가능한 팀이 들국화였다.
▽전=찬권이는 무슨 드럼을 갖다 줘도 똑같은 소리를 낸다. 우리가 ‘빼샥’ 마르고 힘없던 시절에 그걸 감추려고 되레 힘 있게 두드리던 게 생각나 기분 되게 좋다.
―주찬권의 1주기는 어떻게 보낼 건가.
▽최=찬권이를 사랑하는 후배들이 힘을 합쳐 추모 콘서트 같은 걸 열면 좋을 것 같다. 젊은 인디 뮤지션들이 찬권이의 숨은 명곡을 리메이크해서 앨범도 내고 공연도 하면…. 그 친구들이 주인이니까. 그들이 필요로 한다면 그땐 참석할 수 있겠다.
▽전=하루에 추모를 다 하긴 힘들 거다. 좋아하는 밴드도 많고. 하루는 우리(들국화)가 공연하고, 이튿날은 후배 밴드들이 공연하는 식의 페스티벌 형태가 되면 좋겠다.
―요즘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건 뭔가.
▽전=음악광이 됐다. 이렇게 열심히 해본 적이 없다.
▽최=변함없는 애월(제주시 애월읍) 낙조를 보는 일이다. 그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굉장히 행복감을 느낀다.
―힘들 때 들국화의 노래를 듣나.
▽최=아니다. 힘든 날엔 한 곡만 무한 반복해 듣는다. 최근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그렇게 들었다.
▽전=‘걷고, 걷고’와 ‘하나둘씩 떨어져’를 포함한 우리 신곡 몇 개를 들었다. ‘들국화로 必來’를 들었는데 감동이 되고 편안하더라.
―앞으로의 계획은….
▽최=정말 좋은 곡 좀 만들어보고 싶다. 좋은 곡이 나온 이후에야 활동 계획을 짤 것 같다. 간판은 최성원이 될 수도, 들국화가 아닌 다른 팀명이 될 수도 있다.
▽전=4월쯤 전인권이란 이름으로 중·소극장 콘서트를 해볼까 한다. 들국화의 신곡도 부를 거다. 들국화를 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찬권이를 보내면서 ‘더 많이 활동해서 들국화가 빛나게 해볼게’란 독백을 했다. (들국화의 활동 재개에 대해) 가장 절실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상황이 안 좋을 때, ‘다 죽었어!’를 외치며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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