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데뷔하는 기분이어서 의욕이 넘친다. 데뷔하고 3년 뒤 일본에 가는 바람에 한국 무대엔 설 기회가 적었다. 얼마 전 ‘열린음악회’ 출연은 신선했다. 목이 메어 노래를 못 부를 뻔 했지만….”
함박눈이 내리던 20일, 서울 이촌동의 한 녹음실에서 만난 계은숙(52)은 표정이 밝았다. 의욕도 넘쳤고, 자신감도 충만했다. 호탕한 웃음도 자주 내보였다. 30여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2008년 돌아와 5년을 칩거하며 우울증 치료도 받았다는 사람 같지 않았다.
계은숙은 그동안 아흔을 앞둔 어머니를 봉양해 왔다. 평소 당뇨가 심했던 어머니는 현재 알츠하이머까지 앓고 있다.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날 수 없었다.
“한 6년 휴식했지. ‘시간’을 이겨내는 시기였다고 할까. 좀 외롭고 고독했지만, 어머니를 모시면서 ‘가수로 살며 너무 어머니를 보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에 허무하고 미안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계은숙이 다시 노래를 하게 된 계기 역시 어머니다. ‘이제 가수 안 하냐’고 묻는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다시 ‘가수 계은숙’이 되기로 했다. 때마침 일본 유명 작곡가 나카무라 타이지가 “곡을 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작년 여름. 계은숙은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매일 노래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현재 녹음까지 끝냈다. 신곡 3곡에 ‘기다리는 여심’ ‘노래하며 춤추며’ 등 자신의 옛 노래 3곡을 담아 2월 초 세상에 내놓는다.
타이틀곡은 나카무라 타이지의 멜로디에 작사가 이건우가 노랫말을 쓴 ‘주문’. 장르는 팝 발라드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엔카의 여왕’이란 이름을 얻었던 계은숙의 팝 발라드는 의외다. 다른 신곡들도 역시 발라드.
“내가 계속 엔카를 하면 멈춰 있는 게 아닌가. 앞으로 나아가야지. 부담은 없다. 노래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늘 자신감이 있었다. 이제 내 인생을 노래할 수 있는 원숙함으로 다시 데뷔해야겠구나 생각하고 있다.”
작년 조용필의 성공은 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계은숙은 “조용필은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증명하지 않았나. 평생 음악만 해오셨기에 가능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며 “용필 오빠 정말 멋있다”고 했다.
계은숙은 1979년 ‘노래하며 춤추며’를 발표하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예쁜 외모와 허스키하면서도 섹시한 목소리로 인기를 모았다. 1982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오사카의 모정’으로 1985년 데뷔, 특유의 보이스와 외모로 현지에서 일본 레코드대상, 전 일본 유선방송대상, NHK ‘홍백가합전’ 7년 연속 출연 등 ‘한류 1세대’로 명성을 떨쳤다.
“감사하고 자부심도 있다. 그런데 나 아니었어도 누구라도 노력하면 그럴 거다. 한국 사람은 능력이 뛰어나고 어디서든 잘 해낼 수 있다.”
잘 나가던 신인 때 일본으로 간 이유를 묻자 “첫사랑에 실패했다”며 하하 웃었다.
“그땐 사춘기였던 것 같다. 당시 언론의 높은 관심에 사랑을 이뤄가려는 과정에서 실패했다. 마침 일본 측에서 제안이 와서, 마음도 달랠 겸 갔다. 어머니도 상당히 말렸는데, 도전하고 싶었다. 그러다 한 자리에서 계속 있다보니 눌러앉게 됐다.”
계은숙은 2007년 겨울 일본에서 불미스런 사건을 겪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말로 당시의 심경을 대신한 그는 “자서전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출간한다. 거기엔 한 기쁨, 한 설움, 한 아픔이 다 있다”고 소개했다.
계은숙은 “방송보다 라이브 무대 위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겠다고 했다.
“내 뜨거운 열정이 남아 있는 한 무대에서 팬들을 만나고 싶다. 마지막 인생, 한국에서 불태우고 싶다.”
계은숙은 현재 자녀 없는 ‘돌싱’이다. 1992년 세 살 연상 한국인 사업가와 결혼했다 1997년 이혼했다.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있을까.
“희망은 아직 품고 있는데,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시겠지. 근데, 남자는 믿을 수가 없어.”
계은숙은 “체질적으로, 유전적으로”, 또 목이 상할까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귀국 뒤 술이 좀 늘었다고 했다.
“세 잔이면 치사량이었는데, 요즘은 좀 늘어 6잔까지. 한국 술문화도 배우고. 좋아.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