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하며 라디오를 듣던 남편이 던진 말에 박수를 치며 공감했다. 당시 라디오에서는 이별 후 정처 없이 거리를 서성이며 방황한다는 내용의 가사가 담긴 한 여가수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절절할 수 있겠으나 우리 부부에겐 ‘뭐 그런 걸로 그렇게 힘들어할 것까지야. 그래도 바람 쐴 시간 여유가 있어서 좋겠군’ 싶은 사연이기도 했다.
마침 동석했던 우리 집 세 살 ‘떼쟁이’ 씨는 “그런 노래 말고 ‘울면 안 돼’나 ‘루돌프 사슴코’를 틀어 달라”고 발을 굴렀고, 결국 우리는 라디오를 끄고 전자음 가득한 동요 메들리를 들어야 했다.
우리가 이토록 ‘건조’해진 게 바쁜 생활 탓인지, 호르몬 탓인지, 그도 아니면 떼쟁이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아주 자극적이지 않은 이상 타인의 로맨스는 자주 들으면 지겨운 게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TV 드라마에서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사라졌다. 과거 TV 드라마의 가장 ‘핫’한 장르였던 멜로드라마는 요즘엔 손으로 꼽을 정도다. 로맨틱 코미디(로코) 역시 예전만큼의 힘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로코는 로맨스보단 코미디에 무게가 실려 있다. 또 남주인공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거나 심지어 외계인, 갑작스레 회춘한 노인 등인 것도 특징이다.
이유가 뭘까. 대중문화평론가인 이영미 성공회대 겸임교수의 분석은 흥미롭다. 그는 ‘진지한 애정물의 몰락’이라는 제목의 평론(‘황해문화’ 2014년 겨울호)에서 “젊은 드라마 애호가들에게 연애 이야기란 진지하게 몰입할 소재가 아니며 환상이나 코미디로나 다룰 수 있는 소재가 돼 가고 있다”면서 “환상과 코미디는 현실로부터 거리를 떼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즉, 드라마 속 사랑의 소멸에는 ‘사랑 따위에 목숨 걸지 않는’ 세태가 반영돼 있으며, ‘연애가 인생의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차릴 만큼 세상이 복잡다단하고 팍팍해졌다’는 해석이다.
우리 부부만 메마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잠시 안도했으나 곱씹어 생각하면 씁쓸하다. 현재 지상파 드라마에서 사랑 이야기를 대신하는 것은 KBS ‘힐러’, MBC ‘오만과 편견’, SBS ‘펀치’ ‘피노키오’ 등 부조리한 사회를 소재로 삼은 사회물이나 특정 직업 세계를 다룬 전문직 드라마다. 그리고 그나마 사랑을 다루는 건 ‘막장 드라마’다.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주목받는 사랑은 ‘막장’뿐이라니…. 유치한 사랑 노래는 지겹다지만 사랑을 시시해하는, 늙어 버린 드라마 역시 슬프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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