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 최대 화제작이었던 드라마 ‘미생’의 김원석 PD는 인터뷰에서 “미생은 페이소스가 살아있는 코미디”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하지만 대형 상사를 박차고 나온 오상식과 장그래가 자동차를 타고 요르단 사막을 가로지르는 결말은 오히려 판타지에 가까웠다.
‘페이소스가 살아있는 코미디’를 제대로 해낸 직장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2005∼2013년 시즌1에서 9까지 방영된 미국 시트콤 ‘디 오피스(The Office)’에 주목해 볼 만하다.
디 오피스의 배경은 미국 소도시의 한 제지회사 지점.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가 초점이다. 지역 방송사가 이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내보내기 위해 등장인물을 취재한다는 설정으로 페이크 다큐 형식을 띠고 있다. 등장인물은 종종 인터뷰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누군가 우스운 행동을 하면 ‘저것 보라’는 듯 카메라를 향해 눈짓하기도 한다.
지점장인 마이클 스콧(스티브 커렐)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가 오상식인 줄 착각하고 있는 상사’다. 자기가 불쑥 던지는 성차별 인종차별적 농담을 직원들이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상대해 주지 않으면 은근슬쩍 상사의 권위로 관심을 강요하며, 책임질 일은 부하 직원에게 떠넘기기 일쑤다. 다른 직원도 만만치 않다. 상사에게 충성을 다하는 아첨꾼, 머리는 좋은데 동료 골탕 먹이는 데만 그 머리를 쓰는 꾀쟁이, ‘내 상사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인턴 등이 등장한다.
디 오피스가 그리는 사무실 풍경은 꽤 사실적이다. 딱히 능력과 성과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 곳, 얼버무리기로 실수를 넘어갈 수 있지만 상사의 몽니도 참아야 하는 곳, 그러면서 누가 언제 책상을 빼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디 오피스의 세계다. 시즌1 첫 회부터가 그렇다. 본사에서 인원 감축 지시가 내려온다. 우리 지점 혹은 바로 옆 지점에서 누군가를 해고해야 한다. 지점장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바로 사람, 직원들이죠”라며 공염불만 읊는다. 직원들은 서로 누가 잘릴지 수군대면서 ‘나는 아니야’ 혹은 ‘나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원 감축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어영부영 미뤄진다.
디 오피스는 사실 미드 팬 사이에서도 진입장벽이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 페이크 다큐라는 형식도 낯설고 등장인물의 수위 높은 엽기 행각은 언제 웃어야 할지조차 애매하다. 그럼에도 이 시트콤이 여전히 ‘필수 미드’ 목록에 드는 이유는 지긋지긋해도 그 안에서 버틸 수밖에 없는, 바로 우리의 것이기도 한 회사 생활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완생을 꿈꾸는 것조차 벅찬 진짜 미생이 ‘그 사무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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