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15년. 정월에 들어서자 조선의 극장가는 만화영화의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했구나. 먼저 깃발을 올린 건 ‘빅 히어로’ 되시겠다. 세계를 주름잡는 아메리카 디즈니 족이 21일 출정을 선포하는 게 아닌가. 이에 다음날로 야심만만한 젊은 여장수가 이끄는 한국의 ‘생각보다 맑은’ 무리도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자 기회만 엿보던 일본의 에쑤에푸(SF) 애니메이숀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도 29일 이름처럼 진격을 선언했다. 아, 아스라이 떠오르는 삼국지연의의 향취여. 위촉오(魏蜀吳)와 같은 3편의 만화 앞에 어떤 운명의 신이 버티고 섰단 말인가.
●대제국을 꿈꾸는 위나라 ‘빅 히어로’
뭔 수사가 그리도 필요하리오. 들인 군비가 미국 돈 1억6500만 딸라(약 1785억 원). 대륙을 뒤흔든 조조의 기세가 푸드득 밀려든다. 게다가 지난해 이맘때 한반도에서 ‘겨울왕국’으로 1000만 제국을 건설했던 여운이 아직도 입안을 감도는 바에야.
‘렛 잇 고’ 사자후(獅子吼)로 청각을 손상시켰던 추억. 올해는 ‘무쇠 팔 무쇠 다리’(실은 물렁 팔 물렁 다리) 로봇 신공으로 갈아입었다. 천재 소년 히로(라이언 포터)가 자신의 형인 공학도 테디(다니엘 헤니)가 만든 로봇과 함께 세상을 구한다는 전법. ‘따뜻한 유머’를 연마한 디즈니 파와 초인 영웅에 일가견이 있는 마블 파가 힘을 합치어 새로운 무예를 선보인다.
조선을 홀릴 미약(媚藥)도 마련했다. 김상진 캐릭터 디자인 슈퍼바이저가 이끄는 디즈니 군단은 다니엘 헤니는 물론 한국계 배우 제이미 정도 참여시켰다. 그런데 그가 맡은 역 ‘고고’는 디즈니 최초의 한국인 캐릭터. 실제로 쇼트트랙 한국낭자의 기운이 넘실거리질 않나. 허나 세 살배기 갓난애도 몽환에 빠뜨렸던 ‘함께 눈사람 만들래’를 재현하기엔 다소 소년 취향의 분위기가 강하지 싶다.
▲[신년운세는?] 아, 기상은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틈새시장 일구고픈 촉나라 ‘생각보다 맑은’
흑, 차라리 묻지 말라. 디즈니 뒤에 제작비를 까는 건 법도에도 어긋난다. 그보다 주목할 건 예상 밖으로 현란한 초식일지니. ‘럭키미’ ‘사랑한다 말해’ ‘학교가는 길’ ‘코피루왁’ 4편의 옴니버스 작품은 각기 다른 다양한 그림체와 주제를 쏟아냈다. 모두 26세 한지원 감독이 거의 혼자서 일궈낸 결과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앳된 외모에 방심했다간 파르라니 매서운 칼끝에 소스라칠 터. 10대부터 30대를 아우르는 우리네 장삼이사(張三李四)를 등장시켜 담박하되 정확하게 맥을 찍어온다. 굳이 희망을 주려고도, 교훈을 전할 의도도 없지만 내장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마력. 쥐뿔도 없이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갈파하던 제갈량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리니.
▲[신년운세는?] 남을 누를 가업은 아니 되니 홀로 살 길을 도모할 지어다.
●물산(인프라)가 풍부한 오나라 ‘진격의 거인’
디즈니만한 화력은 아니다. 그래도 ‘만화의 곡창지대’ 일국(日國)에서 나고 자라 바탕이 넉넉하지 아니한가. 원작은 지네 나라에서만 누적판매 4000만 부를 넘겼다. 한반도에서도 14권까지 출간돼 60만 부 이상 팔아치웠다. 그만큼 우군(팬 층)의 지지가 빵빵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식인 거인들로 인해 인류가 멸망 직전에 놓였단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한 ‘진격의…’은 왠지 종교무예집단 냄새가 짙다. 신앙이 두텁기에 내딛는 발길에도 거침이 없으리니. 분명 볼 사람은 볼 것이다. 그러나 만화와 TV애니메이션으로 공력 시전이 이미 노출됐다는 약점도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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