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가 연출이 아니라 직접 요리하고 진행? “푸드 포르노 아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5일 14시 47분


이욱정 PD는 “피자처럼 단순하면서도 토핑에 따라 무한대의 변주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이욱정 PD는 “피자처럼 단순하면서도 토핑에 따라 무한대의 변주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PD가 프로그램 연출이 아니라, 요리를 직접 하면서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요리를 통해 문명사를 추적해 온 이욱정 KBS PD 얘기다. 이 PD는 2008년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로 세계적인 방송 프로그램 국제상인 ‘피버디상’을 받고, 지난해 다큐 ‘요리인류’ 1~3편에 이어 이번 설 즈음에 4~8편을 내놓아 호평을 받았다. 이 PD는 4월 6일경부터 KBS에서 매주 4편(편당 10분) 방영되는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KBS ‘쿠킹 스튜디오’에서 이 PD를 만났다. 다변(多變)에 달변(達辯)이었다. 이 PD는 “‘푸드 포르노’가 아니라, ‘푸드 어드벤처’같은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 질문) 새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달라.

=(이PD 답변) 제목은 ‘요리인류 키친’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어릴 때 좋아했다. 존스는 고고학자다. 그게 진짜 고고학자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영화를 보고서 나중에 커서 고고학이나 인류학을 공부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존스가 고고학자가 아니라 요리사라면 어떤 프로그램이 나올까? ‘요리인류 키친’은 요리 어드벤처라고 할까. 존스가 성궤를 찾아서 세계를 누비는 것처럼 최고의 레서피(요리법)를 찾아서 탐험과 모험을 떠나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스튜디오가 존스의 연구실이자 실험실이자 주방이 되는 셈이다. KBS 1TV에 편성될 지 2TV에 편성될 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마 밤 시간대에 방송될 될 것 같다. ‘늦은 밤에 인디아나 존스의 주방에 초대된다’는 느낌을 주고 싶다.

-요즘 요리 프로그램이 많다.
이욱정 PD는 “피자처럼 단순하면서도 토핑에 따라 무한대의 변주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이욱정 PD는 “피자처럼 단순하면서도 토핑에 따라 무한대의 변주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채널만 돌리면 요리 프로그램이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대세다. 하지만 기존 프로그램이 시청자에게 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리는 놀이이자 즐거움이자 예능이면서 또 한편 지식이고 정보이고, 깨달음의 즐거움이다. TV 보는 즐거움 중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됐을 때 얻는 쾌감이 있는데, 그게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만듦새는 아름답고 세련되면서 그 안에 심오함 깊이가 담겨있는 그런 프로그램이 목표다. 요리와 함께 음식 뒤에 숨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해보려 한다.

-좀 더 설명해 달라.

=TV에 즉자적이랄까, 즉각적으로 몇 초안에 뭔가를 얻는 그런 콘텐츠가 넘친다. 비난할 생각은 없다. 요리 프로그램도 즉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최근에는 ‘푸드 포르노’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런데 포르노그래피와 아트의 구분이 뭘까? 명화 속의 벌거벗은 인간과 포르노의 차이는 뭘까. 포르노가 즉각적인 감정의 극단에 호소한다면, 명화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고 본다. 그저 벌거벗은 모습을 보는 것 이상의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을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TV도 곱씹어보고 한 템포 쉬면서 생각을 해봤을 때,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이 중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주 먹는 파스타, 샌드위치의 안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구나, 이런 뜻이 있었구나’하는 것을 시청자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

-프로그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나.

=메뉴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비(非) 한식 메뉴가 될 것이다. 한식은 공부 더하고 내공 쌓은 다음에 하고 싶다. 또 ‘남의 것을 알아야 내 것이 잘 보인다’는 생각도 있다. 프로그램은 매주 아이템을 바꾼다. 한 주는 파스타, 한 주는 샐러드 식이다. 1회마다 2개 요리가 나간다. 먼저 그 음식의 오리지널 레서피를 빨리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직접 만들어보기도 어렵다. 다음에는 시장에서 재료를 사서 할 수 있는 요리를 천천히 보여줄 생각이다. 시리즈를 다 보면 ‘내가 요리 50개는 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 요리를 해보고 싶지만 재주가 없어 안 해 봤다는 분들에게 자극을 주고 싶다.

-다큐PD가 매일 연속 방영하는 데일리 프로그램을 만들고, 출연까지 한다니 이례적이다.

=장기 기획 다큐멘터리는 한 2년 동안 한약처럼 다리고 다려서 엑기스만 내놓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요리인류는 8부지만 이것도 많은 편이고, 4,5부작이 보통이다. 말하자면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안심 등심만 식탁에 내놓고 나머지는 다 냉동고에 넣어 사장시키는 식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식성이 다양해져 꼬리만 좋아하는 사람, 특수부위 좋아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소 한 마리를 데일리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다큐에는 담지 못한 흥미로운 재료들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큐에 담지 못한 나머지를 버리는 것은 시청자들이 TV 수상기로만 프로그램을 소비하던 때의 제작 방식이라고 본다.

-한편이 10분 안쪽이면 길이가 짧아 모바일로 보기도 편할 것 같다.

=‘요리인류’도 인터넷으로 사전 프로모션을 적극적으로 했다. 작년에 요리인류 1~3편 방송 전에 포털 사이트에 TV 캐스트 채널을 열었다. 영화 티저 광고처럼 만든 영상 클립을 30, 40개 올렸다. 클립들 합쳐서 조회가 거의 180만 회 정도 됐다. 인기 있던 것은 한 개는 조회수가 80만 회가 나왔다. 다큐는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특히 KBS를 잘 안 보던 (웃음) 젊은 세대들이 클립들을 보고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요리인류 후속편 제작 계획은?

=2016년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원래 다큐 마치고 나면 조금 쉬는데 데일리 프로그램 준비하느라 하루도 못 쉬었다. 2016년 요리인류 시리즈는 4편정도 제작할 계획이다. 큰 테마는 ‘발효’로 하려고 한다. 이번 편 주제에 ‘빵’이 있었는데, 만들면서 인류 최고의 레서피는 발효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발효는 불이 없는 요리다. 한국이 발효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인 식 문화권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동서양 국가도 발효 기술과 문화를 갖고 있다.

-요리인류 제작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요리는 뭐였나?

=하나를 꼽기가 어렵다. 굳이 꼽자면 미국 남부의 통돼지 바비큐다. 아주 단순한 레서피인데 근원적인 어떤 것을 느끼게 해줬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요리는 단순하지만 거기에 만든 사람의 혼이 담긴 요리일 것이다. 복잡한 레서피가 아니라도 만드는 사람의 진심이 담겨있는 요리는 먹어보면 신기할 정도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듯 하다.

-점심은 뭐 먹었나, 평소 무슨 음식 좋아하나?

=떡 만둣국 먹었다. 아버지가 평안도 진남포 출신이시다. 어릴 적부터 만두하고 냉면 많이 먹었고 지금도 제일 좋아한다. 이번에 요리인류 만들면서는 고기를 많이 먹었다. ‘불의 맛’ 편에 나오지만, 그릴링, 로스팅, 스피드 로스팅 등 구운 고기를 많이 먹었다. 바비큐 촬영할 때는 이틀 동안 매끼를 고기로 먹기도 했다. 이제 고기 맛을 알 것 같다. 고기가 질리다가도 이틀정도 안 먹으면 또 당긴다.

-요리학교 다닌 뒤 달라진 게 있나?(이 PD는 ‘누들로드’를 마친 뒤 2009~2010년 요리 전문학교 ‘르코르동 블뢰’에서 수학했다.)

=내가 해보니 남의 요리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못하게 됐다. 전에는 레스토랑 요리에 대해서 쉽게 입으로 평가했다. 내가 해보고 나니 함부로 입방정을 못 떤다.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식당에서 음식이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왜 그렇게 됐을까를 생각한다. 재료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거나,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한 것은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리사로서 본인의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르코르동 블뢰는 직업 요리학교다. 한마디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너무 힘들었다. 내가 그 전까지는 ‘먹물’로서의 삶을 살았다. 방송국 PD도 몸으로 일하는 일이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거긴 정말 땀과 피가 흐르고, 지글지글 끓는 세계였다. 몸으로 부딪히는 세계는 적응이 잘 안됐다. 내가 잘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이 야구를 한 적이 있다. 나를 마이클 조던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조던이 헛스윙하면서 이런 느낌이었겠네’ 싶었다. 그동안 내가 음식 잘 만든다는 얘기는 다 아마추어 수준에서의 얘기였다. 그 학교 학생들이 이미 준프로였다. 거기서 사람의 창의성은 손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 요리를 다르게 보게 됐다. 내가 아무리 요리책을 많이 읽었어도, 펄펄 끓는 주방에서 내손으로 고기를 자르고 만지고 다듬는 손의 감각에서 다른 생각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요리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도 들었다. 그게 스타 요리사 뿐 아니라 에디오피아 촌 여인의 음식까지도 요리하는 사람에 대한 경탄이 나오게 됐다. 그 느낌을 ‘요리인류’에 담았다.

-올해 나이는?

=인터뷰를 할 때 매번 나이는 묻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요리학교 가면서 나이가 ‘리셋’됐다고 생각한다. 남이 나한테 내 나이를 상기시키는 것도 내 스스로 상기하는 것도 싫다. 나이를 생각하면 내 스스로 제약이 되는 거 같다.

-은근히 많다는 얘기?

=(웃음)

-요리를 시도하는 사람에게 조언?

=첫째, 고기 요리를 해라. 짧은 시간에 식객을 휘어잡을 수 있다. 그건 30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둘째, 단순한 요리를 차근차근 한다. 요리는 운전과 비슷하다. 배우기 전에는 어렵지만 배우고 나면 어느 수준까지는 대부분이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연료를 최대한 절감하는) 에코 드라이버가 되기는 어렵지만 안전하게 원하는 곳까지 운전해서 갈 수는 있다. 모든 사람이 최고의 요리사가 될 수는 없지만 단순한 요리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칼질 못해도 된다. 전설적인 셰프도 칼질 잘 못하는 사람 많다. 단계마다 프로세스를 해 나가면 된다. 셋째, 좋은 그릇에 음식을 올려놔라. 그러면 일단 멋있어 보인다.(웃음)

-자신을 요리에 빗댄다면 어떤 요리?

=글쎄…. 모짜렐라 치즈와 토마토, 바질이 올라간 심플한 토핑의 마가리타 피자? 피자를 만드는 것도 먹는 것도 좋아한다. 피자 다큐는 나중에 꼭 해 볼 것이다. 피자가 소우주다. 변화무쌍하다. 토핑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무한대의 레서피가 가능하다. 한국의 불고기 피자처럼 세계 어디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 피자는 다양한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유연한 음식이고, 그리고 쉽게 친해질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그 안에 소우주가 있지만 친근하고 맛있는 프로그램.

-왜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드나.

=음식은 세상과 인간을 바꿨다. ‘누들로드’의 국수는 인류를 즐겁게 했다. ‘요리인류’의 빵과 고기와 향신료는 인류를 움직였다. 우리의 삶을 바꾸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인류가 요리를 시작한 것은 30만년, 50만 년 전일 수도 있고, 더 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인류가 요리를 시작한 이래 만든 수많은 음식 중 지금까지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은 극소수다. 수많은 음식들은 국경과 지역 안에 갇혔다. 하지만 그 중 몇 가지는 바다와 대륙을 건너고, 시공을 넘어서 전 인류의 식탁에 올라왔다. 인간의 삶을 바꿨다. 그 음식을 보면 우리가 무엇을 원해왔는지, 우리 자신이 보인다. 음식 뒤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인류가 걸어온 여정과 흔적과 기억이 요리 한 접시에 담겨져 있다. 건축이나 패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도 마찬가지겠지만, 음식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누들로드와 요리인류를 관통하는 대주제가 아닌가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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