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 LG경제연구원은 ‘절제된 소비의 탈출구, 작은 사치가 늘고 있다’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여기서 작은 사치란 목돈이 드는 상품 대신 소비자가 감당할 만한 비용의 아이템을 구매하며 만족감을 얻는 행위를 일컫는다. 명품업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 고가의 의류나 가방 대신 부담이 적은 유명 브랜드의 립스틱이나 스타킹을 사는 경우다.
최근 방송가에도 이런 소비 경향이 짙게 드리웠다. 고급 맛집 안내보다는 직접 음식을 해먹는 ‘쿡방(요리 방송)’이 대세다. 뷰티 프로그램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제품을 앞다퉈 소개하고, 화려한 해외관광보다는 저렴한 배낭여행이나 국내 가족여행을 주로 다룬다. ○ 외식보다 집밥, 브랜드보다는 칩 시크(cheap chic)
‘스몰 럭셔리’가 가장 도드라진 분야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 화제의 tvN ‘삼시세끼’나 올리브TV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는 직접 만드는 요리가 메인 소재다. 지상파 예능에도 ‘집밥’이 빠지지 않는다. KBS2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 MBC ‘나 혼자 산다’ 등은 음식 프로그램이 아닌데도 출연자의 요리 장면을 줄기차게 보여준다.
채널A ‘잘 살아보세’도 남한 남성과 탈북 여성이 가족을 이뤄 생활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정작 시청자는 출연자들이 만든 ‘오징어순대’ ‘토끼탕’ 등 북한 요리에 관심이 뜨겁다. ‘신동엽…’을 연출하는 석정호 PD는 “특급주방장의 일품요리 레시피나 유명 레스토랑을 소개하던 포맷은 줄어드는 추세”라며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드는 음식이나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점포(노포·老鋪)를 발굴하는 게 요즘 예능 트렌드”라고 말했다.
뷰티 프로그램도 ‘소소한 사치’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온스타일 ‘겟 잇 뷰티’나 올해 시즌5를 맞은 패션N ‘팔로우 미’가 대표적. 최근 이들의 화두는 ‘칩 시크’(저렴하나 세련된) 제품. 올해 초 ‘겟 잇 뷰티’는 ‘만원의 행복’이란 코너를 통해 1만 원 이하 미용제품을 방송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팔로우 미’의 김현아 PD는 “시즌1 방송 땐 명품과 고가브랜드가 주목받았다면 최근엔 적은 비용으로 만족도가 높은 제품에 시청자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지상파로도 확장됐다. KBS2는 지상파에서는 최초로 뷰티 프로그램 ‘어 스타일 포 유’를 다음 달 5일 방송한다. 역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에 초점을 맞춘다.
여행이나 건강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국내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캠핑이나 낚시 여행을 다루는 내용이 많다. 건강 역시 최소 비용을 추구한다. 최근 시청률 4∼5%가 나오며 수요일 밤의 강자로 등장한 채널A ‘나는 몸신이다’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운동법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비싼 한방 침이나 약선(藥膳·약이 되는 요리)을 다루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다.
○ 경기불황이 주요인, 과한 소비엔 반발
‘소소한 사치’가 방송가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명확하다. 저성장시대가 이어지며 체감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실제 명품업계도 스몰 럭셔리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는 불황과 맞물린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시청자들이 적은 비용으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방송에도 요구하는 셈.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시청자들이 현재를 즐기는 아이템에 몰입하고 있다”며 “소비를 통한 찰나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아끼고 저축하던 20세기와 결이 다르다”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정도가 과할 땐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요즘 대세인 육아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쓰는 육아용품이나 외출 장소는 방송에 나올 때마다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른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삼둥이가 쓰는 턱받이는 없어서 못 팔 지경. 허나 일부 출연자가 입은 프리미엄 패딩이나 특급호텔 캠핑장은 지탄을 받았다. 어느 정도의 사치는 받아들이되 선을 넘는 ‘빅 럭셔리’엔 강하게 반발한다.
간과해선 안 될 대목도 있다. 소소한 사치 역시 상업성이란 토대 위에 자라났다. 스몰 럭셔리의 핵심 분야는 화장품이나 아웃도어 제품, 주방용품. 최근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고 큰 시장이다. 정 평론가는 “시청자에겐 ‘작은’ 구매일지 몰라도 관련업계는 소비에 집중한다”며 “방송과 연계된 시장이 확실해 서로 이득을 얻는 구조라 이런 흐름이 발 빠르게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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