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영화들이 허구의 이야기를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사건과 실존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기대감으로 관객의 호응을 더하고 있다. 사실과 허구 사이의 이 같은 ‘줄타기’는 1100만 명이 관람한 영화 ‘암살’(제작 케이퍼필름)과 800만 관객 동원을 앞둔 ‘베테랑’(제작 외유내강)의 인기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공통점으로도 꼽힌다.
‘암살’과 ‘베테랑’은 허구의 이야기다. 물론 ‘암살’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김구, 김원봉 등 역사의 실존인물이 등장하지만 영화가 그려낸 사건은 감독의 상상에서 출발했다. 최동훈 감독은 “특정 인물들을 모델로 삼지 않았다. 시대를 반영하는 인물을 상상했다”고 밝혔다. ‘베테랑’ 측도 “완벽한 허구”라고 강조한다.
가상의 이야기라고 선을 긋는 제작진과 달리 관객의 반응은 조금 다르다. 실제사건은 물론 영화의 모티프가 됐음직한 인물을 찾아내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저격수는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나아가 ‘암살’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정재의 실제 모델을 찾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베테랑’ 역시 비슷한 분위기다. 위법을 일삼는 부도덕한 재벌3세와 그를 비호하는 여러 세력이 실제 재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의견이 많다. 폭력사건에 휘말린 아들을 보호하려고 경찰에 외압을 행사하고, 시위하는 협력업체 직원을 폭행하는 장면을 두고 여러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들 영화가 택한 방식은 실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팩션’ 장르와는 개념이 다르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확장하는 방식이 ‘팩션’이라면 ‘암살’과 ‘베테랑’은 허구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실제 사건 및 인물과 맞닿아 있다.
‘베테랑’의 류승완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런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는 연출자가 처음부터 의도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관객이 영화와 현실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식을 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방식은 다른 영화들로 이어진다. 27일 개봉하는 임창정·최다니엘 주연의 ‘치외법권’(감독 신동엽·제작 휴메니테라픽쳐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사이비 교주의 이야기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모 종교단체 교주의 행적이 겹쳐 떠오르지만 제작진은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원전 사고를 그린 영화 ‘판도라’ 역시 실제로 원전을 둘러싼 크고 작은 논란이 이어지는 현실과 뗄 수 없는 이야기란 점에서 맥이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