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의 성공학]情이 부른 공감… 트렌드가 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8일 03시 00분


최근 종영 ‘응답하라 1988’, 일반 드라마와 달리 문화현상 형성
1980년대 배경과 소품 결합해 ‘추억의 시너지 효과’ 발휘

가족과 지역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쌍문동 여러 가족들이 서로 어울리며 뿜어낸 온기는 세상을 따듯하게 덥혔다. tvN 제공
가족과 지역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쌍문동 여러 가족들이 서로 어울리며 뿜어낸 온기는 세상을 따듯하게 덥혔다. tvN 제공

“이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는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봐줘.”(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1화)

“어른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빴을 뿐이고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도 아프다.”(2화)

“가끔은 엄마가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엄마에겐 최소한의 체면도 자존심도 없는지 화가 날 때가 있었다. 그건 자기 자신보다 더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게 있기 때문이라는 거. 바로 나 때문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5화)

최근 종영된 ‘응답하라 1988’(응팔)을 본 후 시청자들에게 회자된 드라마 속 어록들이다. 드라마가 끝났지만 현재까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이 같은 ‘응팔 어록’들이 확산되고 있다. 그만큼 ‘응팔’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기대를 뛰어넘었던 ‘응팔’

이 드라마의 폭발적 반응은 우선 수치로 드러난다. ‘응팔’은 케이블TV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16일 방송된 ‘응팔’ 마지막 회(20화)의 평균 시청률은 19.6%(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로, 이전 케이블 최고 시청률인 ‘슈퍼스타K2’ 결승전(18.1%·2010년 10월 22일)을 훌쩍 넘었다.

대박 시청률은 광고로 이어졌다. 광고업계에 따르면 ‘응팔’ 광고료는 지상파 최고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MBC ‘무한도전’ 광고료(15초당 1200만 원 대)에 가까웠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응팔’ 광고료가 지난해 같은 시간대 방송한 드라마 ‘미생’보다 3배가량 높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단순히 시청률만 높았던 게 아니다. 지상파에서 방영되는 일일 가족드라마도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는 40, 50대 여성 시청자 위주로만 호응을 얻는 등 전반적인 화제성이 크게 떨어진다. 하지만 ‘응팔’은 인터넷 블로그, 커뮤니티 게시판, SNS, 동영상 조회수 등 온라인 화제성을 분석하는 ‘드라마 화제성 지수’, ‘콘텐츠파워지수’ 등에서 1위를 차지했다. 시청률뿐 아니라 문화콘텐츠의 트렌드를 주도했다는 의미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기존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기보다 가능성 높은 신인급 배우를 발굴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응답하라 1997’에서는 가수 서인국과 걸그룹 ‘에이핑크’의 정은지, ‘응답하라 1994’는 정우 유연석 손호준이 스타덤에 올랐다. ‘응팔’에서는 걸그룹 ‘걸스데이’의 혜리를 비롯해 류준열 박보검 안재홍 등이 큰 인기를 누렸다.

응팔 속 배경음악도 가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수 오혁이 리메이크한 이문세의 ‘소녀’를 비롯해 이적이 부른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 박보람이 부른 동물원의 ‘혜화동’ 등 1980년대 히트곡들이 음원차트를 휩쓸었다.

응팔의 성공학

“응팔 어록이 정리된 블로그를 링크해 페이스북에 올려놨어요. 사람들의 호응이 정말 좋더군요. 다들 따뜻하고 훈훈한 무언가를 준다는 느낌을 받았대요.”(주부 이지영 씨·37)

‘응팔’의 성공은 단순히 드라마 한 편이 유행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화적 함의가 있다고 문화평론가들은 지적한다.

우리가 잊고 지내던 가족의 ‘정(情)’을 담으면서 사회적 울림을 줬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잊었던 따뜻한 공동체에 대한 아련한 사랑과 추억을 드라마 속에 녹여낸 것.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1980년대 서울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이다.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 등 전작이 1990년대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사랑과 우정을 그리며 20, 30대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들였다면 ‘응팔’은 중장년층까지로 시청자 층을 넓혔다. tvN 측은 “전작의 성공법칙인 청춘 간 러브라인, 남편 찾기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있었다”며 “이에 덕선(혜리) 택(박보검) 정환(류준열) 선우(고경표) 동룡(이동휘) 등 골목길 5인방의 얽히고설킨 가족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뤘다”고 말했다.

극 중 가족과 이웃사촌 사이에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작은 것도 나누는 모습에서 젊은이들은 신선함, 중장년층은 추억과 훈훈함을 느꼈다. 회사원 백재철 씨(43)는 “명예퇴직에 내몰린 동일(성동일)에게 가족들이 감사패를 전달하는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며 “‘사오정’ ‘오륙도’란 말이 유행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부담감이 크지만 가족을 위해 한번 해보자는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16일 열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응팔’을 칭찬하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선정성 등으로 이유로 MBC ‘내 딸, 금사월’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한 위원은 “‘응답하라 1988’을 보면 가족 간의 사랑처럼 훈훈하고 건전한 이야기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케이블방송도 이렇게 하는데, 왜 지상파는 못 하냐”고 이야기한 것이다.

가족, 이웃 간의 소소한 사랑과 일상은 극 중 1980년대 배경과 소품들의 디테일과 결합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드라마 곳곳에 크라운 병맥주, 홍콩 배우 주윤발(저우룬파)이 나왔던 ‘밀키스’ 광고, 브라보콘, 마이마이 카세트플레이어, 보온도시락, 사다리꼴의 쓰레기통, 못난이 인형, 호돌이(서울올림픽 마스코트)가 그려진 연필깎이 등 추억의 소품들이 나와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응팔’ 신원호 PD는 “극 중 배경인 쌍문동을 두고도 고증을 위해 수백 명을 인터뷰했다”고 했다. 시청자 민경미 씨(47) 역시 “나도 덕선이처럼 연탄가스에 죽을 뻔했다”며 “내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 나와서 반가웠다”고 말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드라마의 주요 재미였던 남편 찾기의 결말이 허술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내내 덕선의 남편으로 택과 경쟁하던 정환이 말 한마디로 사랑을 포기하는 부분의 설득력이 떨어졌다는 것. 선우 보라 커플은 알고 보니 동성동본이란 설정이나 보라 덕선 자매가 겹사돈이 되는 결말 부분의 스토리 전개가 다소 억지스럽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네 번째 ‘응답하라’ 이야기를 기대한다. 회사원 최지성 씨(35)는 “차기작은 ‘응답하라 2002’라는 소문을 들었다. 당시 나 역시 청춘이었고 한일 월드컵 등 사회적 이슈도 많아 너무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그리운 쌍문동 골목길 ‘응팔’로 기억하고파 ▼
내 마음 속 ‘응답하라 1988’


도대체 이 따뜻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응답하라 1988’은 종영했지만 그 따뜻한 온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여운은 한동안 계속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을까. 카메라가 골목길을 따라 쑥 들어가며 시작했던 ‘응팔’은 이제는 퇴락해 철거를 앞두고 있는 골목길을 카메라가 빠져나오며 끝난다. 아마도 이 땅에 그토록 많았던 쌍문동 같은 골목들은 말끔히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섰을 게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라진 저마다의 골목을 그리워한다.

그 골목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 사는 온기가 넘쳐흘렀던가. ‘응팔’이 짧게 흑백사진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그곳에서 옛 친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방구를 하며 함께 놀았다. 저녁이 되면 라미란이나 이일화 김선영이 그런 것처럼 “밥 먹어라” 하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골목 가득한 밥 내음과 함께 퍼져 나오곤 했다. 정환(류준열) 택(박보검) 선우(고경표) 덕선(혜리) 동룡(이동휘) 같은 한골목에 사는 친구들은 친구집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실감 나던 시절이었다. 주제곡인 동물원이 부른 ‘혜화동’의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라는 가사는 ‘응팔’이 우리에게 건넨 약속시간이었다. 우리는 그 약속시간에 맞춰 TV를 켜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그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응팔’의 따뜻함은 당대를 겪은 세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대를 겪지 않았던 지금의 청춘들은 그때의 같은 나이였던 청춘들의 전혀 다른 삶을 들여다보며 일종의 판타지를 느꼈다. 어쩌면 저리 다를까. 물론 입시 경쟁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가 서로의 앞날을 걱정해주고 축복해주는 풍경은 낯설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또 디지털 세상의 편리함만큼 차가워진 지금의 관계들은, ‘응팔’이 보여주는 불편해도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관계에 대한 그리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것은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위로와 위안이다. 당시는 죽을 것만 같았던 가난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가슴앓이는 물론이고, 막막하기만 했던 미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갈팡질팡하던 그들은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잘 살아 나간다. 택이는 연전연승을 기록하는 프로바둑 기사가 되고, 선우는 의대생이 되고, 정환은 공군 장교가 된다. 연거푸 대학입시에 떨어졌다가 결국 법대생이 된 정봉(안재홍)은 그러나 고시를 포기하고 백종원같은 요리연구가의 길을 택한다. 물론 그것은 현실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되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막막했던 시절은 하나의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알려준다. 시간의 흐름을 담는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를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해준다.

1980년대를 경험했던 윗세대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주고, 당대를 겪지는 않았으나 청춘이라는 공통분모로 드라마 속 인물들에 몰입할 수 있었던 젊은 세대에게는 판타지를 주었으니 ‘응팔’이 19.6%(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로 케이블채널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라미란 김성균 이일화 성동일 김선영 최무성이 보여준 이웃 간의 가족 같은 정을 추억으로 전해주면서, 덕선 정환 택 선우 보라의 사랑과 우정을 담아낸 ‘응팔’은 그래서 폭넓은 세대의 공감대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공감대를 마치 자석처럼 끌어모으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저 쌍문동 어딘가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 골목길이다. 사라졌기에 그리움은 더 간절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골목길은 ‘응팔’이란 드라마로 영원히 남았다. 그렇게 마음과 기억 속에 복원된 골목길만으로도 충분했다.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던 그 기억이 우리에게 남겨졌다는 것만으로도.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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