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린이날 오랜만에 전주국제영화제(JIFF)에 갔다. 영화 상영을 하지 않을 땐 햇볕 아래서 산책을 하며 자유 시간을 보냈다. 재미있는 영화와 더불어 전주 시내의 매력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
‘한국식 영화제’는 내게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한국식이라고 이름 붙이는 이유는 한국 영화제 특유의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인들도 영화 애호가이고 영화 관련 행사를 많이 연다. 벨기에 브뤼셀도 서울처럼 매년 수십 개의 다양한 영화제가 열린다. 그런데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영화제 특유의 분위기, 그러니까 ‘영화제 문화’까지는 없는 것 같다.
한국의 ‘영화제 문화’를 부산에서 처음 경험했다. 2005년 10월, 한국에서 보낸 첫 가을 어느 주말에 아무런 계획 없이 내 친구 문수와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가게 됐다. 그날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주말이 된 날이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기 때문에 우린 영화표를 미처 예매하지 못했고, 매진되지 않은 영화가 별로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봤다. 그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원점’이었다. 1967년 작품 속 설악산 풍경을 보니 제법 신기했다.
영화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상영이 끝나고 난 뒤 맛본 영화제 분위기였다. 새벽까지 신나는 해운대 골목을 영화제 방문객들과 뒤섞여 마음껏 누볐다. 영화제 분위기에 잔뜩 도취된 것만 같았다. 오후엔 해수욕도 했고 일몰 시간엔 해변에 앉아 맥주 몇 캔을 마시며 가벼운 마음으로 순간을 강렬하게 즐겼다. 물론 날씨가 맑아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었다.
벨기에에서 체험했던 영화제와 달리 그날 부산영화제에서는 영화관의 경계를 뛰어넘는 어떤 ‘정신’을 느꼈다. 영어로 vibe(분위기, 느낌)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부산에서는 영화제의 여운이 길거리에서도 느껴진다. 내가 베니스나 칸 영화제 같은 대규모 유럽 영화 축제에 가본 적이 없어 비교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부산영화제는 영화 관계자나 영화 마니아뿐만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실제 관람객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참가할 수 있는 종합적인 대중 축제같이 느껴졌다. 반면에 브뤼셀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평소보다 좀 더 시끄럽고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건 영화관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름이다.
2006년 봄에 방문한 전주영화제에서도 이런 영화제 고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주영화제는 부산영화제보다 ‘인디 영화’ 위주로 상영했다. 웬만한 영화관에서는 보기가 거의 불가능한 영화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때 본 영화 중 나는 무당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가장 인상 깊었다. 그 외에도 수십 편의 국내외 단편 영화를 봤다. 전주영화제는 세계관을 넓혀주는 다양한 영화들을 분별 있게 선정해 영화제 기간 한 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줬고, 그 점이 참 고마웠다.
그해 가을 한국에 놀러왔던 벨기에 친구 3명을 데리고 부산영화제에 또 갔다. 그때는 여러 영화를 예매해 놓고 오전부터 열심히 관람했다. 밤에는 부산 이곳저곳에서 놀다가 해운대 모래 위에 옷을 전부 벗어 놓고는 영화제 뒤풀이라도 하는 듯 ‘자정의 해수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7년 봄, 일시적인 실업 상태에 있었던 나는 JIFF 사무국에 지원해 초청팀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JIFF 지기’로 활동한 그 열흘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고, 그때부터 온갖 영화제에 관심이 생겼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지금까지 7번을 갔고, JIFF는 올해로 5번째다.
얼핏 기억을 되살려보면 ‘영화제 바이러스’에 걸린 이후 가본 영화축제는 서울독립영화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국제여성영화제, 이반영화제, 환경영화제, 부산국제단편영화제 등이다. 그런데 그 많은 영화제 중 부끄럽게도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아직 한 번도 못 가봤다. 아직 한국을 떠날 때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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