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진 실존인물을 연기하는 일은 배우를 짓누르는 부담이다. 하물며 그 인물이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경우에는 더 하다.
앞서 ‘명량’에서 이순신을 연기한 최민식, ‘사도’에서 영조 역을 맡은 송강호가 겪는 그 과정을 이번에는 배우 차승원(46)이 거쳤다. 9월7일 개봉하는 ‘고산자, 대동여지도’(제작 시네마서비스)에서 조선 후기 지리학자이자 실학자인 김정호의 삶을 그린다. 덕분에 관객은 추석 연휴 극장가에서 또 한 명의 실존인물을 만나게 됐다.
개봉에 앞서 9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만난 차승원은 “시나리오를 받고 3주가 지나도록 제작진에 ‘한다’ ‘안 한다’ 답을 못했다. 실존인물을 그려야 한다는 부담 탓이었다”고 돌이켰다. “역사적 기록은 아주 짧지만 남긴 업적은 어머어마한 인물의 사상과 발자취를 과연 따를 수 있을까 고민이 컸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차승원은 ‘고산자’로 들어섰다. 새로운 작업을 향한 호기심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지난해 8월17일부터 올해 5월4일까지 장장 10개월의 시간을 차승원은 ‘고산자’에 쏟아 부었다. 김정호의 발걸음을 따라 국토 최남단 마라도부터 백두산 천지까지 빠짐없이 스크린에 담는 시도에 앞장섰다.
그의 첫 촬영은 백두산 천지에서 이뤄졌다. 백두산의 절경과 맑은 천지의 모습이 실사 그대로 스크린에 담긴다. 차승원은 “‘편하게 오라’는 감독의 말에 가뿐한 마음으로 찾은 첫 촬영장소가 백두산 천지였다”며 “천지의 맑은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데, 우리가 진행한 두 번의 촬영 내내 천지가 모두 환하게 열렸다”고 했다. “행운”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예고편으로 공개된 천지의 모습은 완벽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이로 인해 ‘컴퓨터그래픽 아니냐’는 엉뚱한 오해도 받지만 차승원은 “단 1%의 컴퓨터그래픽도 없는, 전부 실사 촬영”이라고 강조했다.
영화는 김정호의 삶을 추적한다. 조선의 지도를 목판에 새겨 이를 백성에 나눠주려는 김정호, 지도는 나라 소유라고 맞서는 흥선 대원군(유준상)의 갈등이 주요 이야기다. 픽션이 가미된 박범신 작가의 소설 ‘고산자’를 원작 삼았지만 영화화 과정에서 제작진은 김정호를 연구한 여러 전문가의 참여로 사실성을 높였다.
차승원이 김정호를 창조하는 과정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선사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할 때 매 장면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는 그는 “‘고산자’는 홀가분하게 부딪히는 각오로 임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내비게이션 같은 연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합심하고, 보듬고, 의지했다”며 “해악과 웃음이 있는 사극, 우리와 가까운 ‘사람’ 김정호를 완성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물론 패션모델 출신에 세련된 이미지의 차승원과 조선시대 실존인물의 만남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있다. 특히 tvN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시리즈를 통해 얻은 ‘차줌마’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영화에 어떤 영향으로 이어질지도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에 대해 연출자 강우석 감독은 “김정호 선생의 실제 초상화와 아주 닮은 차승원의 모습에 ‘역할에 딱이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촬영하며 매번 차승원이 흡사 김정호에 빙의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돌이켰다.
‘고산자’는 김정호의 인간미 역시 놓치지 않는다. 딸을 둔 아버지의 모습에도 주목한다. 실제로도 중학생 딸을 둔 차승원은 영화에서 딸로 만난 연기자 남지현을 볼 때면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고 미소 지었다.
● 차승원
1970년 6월7일생. 1988년 패션모델로 데뷔해 1990년대 톱모델로 활동. 1998년 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에 출연하며 연기 첫 발. 2001년 ‘신라의 달밤’, 2002년 ‘광복절특사’, 2003년 ‘선생 김봉두’까지 코미디 장르에서 활약하며 연속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 2011년 공효진과 함께한 MBC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서 까칠한 톱스타 독고진을 연기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tvN ‘삼시세끼’ 시리즈에서 탁월한 요리 솜씨를 과시해 ‘차줌마 열풍’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