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의 택시로 최루탄 연기가 스민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목숨 걸고 거리에 나선 학생들을 보며 기껏 내뱉는 말이라곤 이게 전부. 그 앞에서 매몰차게 창문까지 닫아 버리는 그다. 그뿐일까.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손님 또 뚝뚝 끊기는 거 아니냐”며 무심한 표정으로 돈 세느라 바쁘다. 오로지 가장으로서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택시를 몬다. 만섭은 그런 인물이다.
어느 영화건 소시민들의 삶에 균열이 생길 때 시대의 아픔은 유난하게 와 닿는다. 먹고사는 것 외엔 관심 없던 만섭의 삶은 광주를 취재하러 온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를 태우며 조금씩 균열이 간다. 앞뒤 재지 않고 총알이 날아드는 현장에 뛰어드는 외국인 기자를 통해 그는 시대의 아픔을 직시해간다.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택시를 몰게 되는 것.
영화는 실화가 바탕이다. 지난해 1월 작고한 힌츠페터는 당시 서울에서 광주까지 ‘김사복’이란 택시운전사가 몬 택시를 탔다. 두 사람이 지켜낸 필름은 군부 독재의 폭압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실제 힌츠페터는 2003년 광주 보도로 언론상을 받으며 “용감한 한국인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와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당신을 찾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서울로 달려갈 것”이라며 애타게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세상에 적잖이 알려진 ‘미담’인 만큼 영화의 전개 자체는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외신기자와 광주에 온 서울 택시운전사라는 두 외부인의 시각을 통해 절제되면서도 담담하게 비극을 그려낸다. 5·18민주화운동을 담은 기존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 그 지점이다. 등장인물들도 거창한 시대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만섭의 여정에 동행하는 대학생 재식(류준열)은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은 평범한 학생이고, 광주 택시운전사 태술(유해진)도 이유 없이 맞아 죽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택시를 몰 뿐이다. 누구 하나 거창한 대사 따위 읊조리지 않고 울부짖지도 않지만 시대의 비극은 충분히 다가온다.
영화는 2008년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해 ‘의형제’(2010년)에서 북에서 버림받은 남파 간첩과 전직 국가정보원 요원의 이야기를 담으며 주목받은 장훈 감독이 연출했다. 장 감독은 이후 ‘고지전’(2011년)에서는 남북이 치열하게 맞섰던 6·25전쟁의 한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면, 이번엔 1980년의 광주를 스크린에 담아냈다. 장 감독은 “한국 현대사의 큰 아픔으로 남은 사건을 다루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면서도 “소시민의 마음속 격랑을 따라가면서 역사는 위인들이 이루는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선택과 용기가 모여 이뤄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택시운전사 역을 소화한 배우 송강호의 연기는 ‘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를 실감케 한다. ‘변호인’(2013년), ‘밀정’(2016년)에서 시대의 비극 한가운데에 선 인물들을 연기해 온 그는 이번 영화에서는 한층 절제되면서도 깊어진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는 다음 달 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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