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살인범은 자신의 지난 행위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기억은 어디서부터 사실이며, 또 어디까지 거짓일까. 어쩌면 이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건 아닐까.
배우 설경구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몸을 내던졌다. 9월7일 개봉하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제작 쇼박스)이 그의 두 어깨에 얹어준 무게는 그만큼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설경구는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냈다.
설경구는 28일 오후 서울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살인자의 기억법’ 시사회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 무게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김남길, 설현 등과 맞춘 호흡이 이야기에 힘을 더하는 사이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든든한 힘은 우선 설경구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설경구 자신은 아직 거기서 벗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오늘은 나만 보였다”면서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경험해보지 못한” 아픔을 연기하는 것이 “촬영 내내 산이었고 숙제였다”는 그는 “다음엔 ‘살인자의 기억법’을 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영화와 그 캐릭터가 자신에게 안겨준 무게가 만만치 않았음을 드러낸 셈이다.
설경구는 극중 50대의 나이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과거의 연쇄살인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죽이면서 살아왔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지 않지만, ‘또 다른 살인범’을 맞닥뜨리고서 자신의 과거와 “살인의 습관”을 기억해내며 위태로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하나 뿐인 딸에게 접근한 ‘또 다른 살인범’이 가해오는 위협에 맞서는 그에게 살인은 본능이 되는 것일까.
자신의 말대로 간접체험조차 해보지 못한 알츠하이머라는 아픔을 지닌 연쇄살인범과 그의 기억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설경구가 선택한 것은 절절한 눈빛과 표정이다. 딸과 자신을 위협해오는 상황에 얽혀 들어가며 느끼는 분노,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기억으로 인해 오가야 하는 현실과 망상의 혼돈이 가져다주는 절망, 그 각각의 눈빛은 설경구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다시 색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배우로서 지닌 탄탄한 역량을 재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얼굴 반쪽의 근육 경련으로서 알츠하이머를 표현해내는 장면은 그의 연기로서만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미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을 통해 캐릭터를 들여다보는 맛을 관객에게 선보인 설경구는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 “큰 산”과 “큰 숙제”를 완숙하게 넘어서고 완수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10kg 이상 체중을 감량한 채 마스크의 강렬함을 더한 설경구는 그래서 또 하나의 ‘인생 캐릭터’를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