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연출한 ‘오션스 일레븐’은 지능적 사기꾼과 최고의 범죄 기술을 익힌 도둑들이 한 탕 벌이는 얘기다. 흥행대박의 이유 중 하나로 조지 클루니, 브레드 피트, 맷 데이면 같은 톱스타를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꼽혔다. 내년 여름 개봉 예정인 ‘오션스 에이트’는 바로 ‘오션스 일레븐’의 여배우 버전이다. 케이트 블란쳇, 산드라 블록, 리한나, 헬레나 본햄 카터, 앤 해서웨이 등 신출귀몰한 범죄를 펼치게 될 여배우들 면면이 화려하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과거 히트작의 남자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서 리메이크하는 것이 유행이다. 작년 개봉된 ‘고스트버스터’가 남자 과학자들을 여성 4인조로 대체했던 것처럼 말이다. 월리엄 골딩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원작인 ‘파리대왕’에서 무인도에 고립된 사춘기 소년들을 소녀들로 바꾸려는 작품부터 스티브 마틴과 마이클 케인이 주연한 코미디물 ‘화려한 사기꾼’, 비행기 조종사의 모험과 활약을 담은 액션물 ‘인간 로켓티어’ 등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다소 엉뚱한 리메이크도 기획중이다. 늘씬한 미녀배우 대릴 한나가 인어로 등장했던 ‘스플래시’를 ‘인어왕자’(?)가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각색중이라고 한다.
장르 불문 여성판 리메이크작을 만드는 것을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린다. 흥행위험이 따르는 신작 대신 리메이크 영화에 여배우를 출연시키는 것을 제작사의 안이한 전략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여배우의 활동 영역이 확장된다는 점에서 환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후자의 경우 배역과 보수 등에서 엄연히 격차가 존재하는 할리우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녀 불평등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공개한 ‘2017 가장 비싼 남녀배우’ 순위에서도 드러났다. 출연료 1위 마크 월버그는 한 해 6800만 달러를 벌었다. 여자 배우 중 1위를 차지한 엠마 스톤의 수입은 2600만 달러, 전체 순위로 따지면 15위였다.
작품 편수를 따져도 격차가 뚜렷하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100대 흥행작 중 여성이 주인공이나 공동 주연으로 등장한 작품은 34편 가량. 거의 해마다 이들 100편 중 여성이 쓴 각본이 15% 이내,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5% 이내에 불과한 상황에서 여배우의 설 자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여성 영화인들은 입을 모은다. 여배우를 위한 시나리오의 빈곤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리메이크 영화라도 일단 선택의 폭이 넓어진 할리우드 여배우들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남성 위주 영화의 비중이 압도적인 한국에서 여배우의 설 자리는 훨씬 좁다. 배우 김윤진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 ‘쉬리’에서 같이 연기한 최민식 한석규 선배들은 매년 새로운 캐릭터와 새로운 영화로 관객과 만난다”며 “여배우가 설 자리가 없는 게 아쉽다”고 토로했다. 다양한 역할이 개발되지 못하는 데는 성별 고정관념도 한 몫을 한다. 오죽하면 그가 “어떤 댓글을 읽었는데 여배우 역할이 피해자거나 민폐,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라며 “다시 태어나면 좋은 작가가 돼서 여배우들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을까.
이달 중순에 개봉 예정인 ‘여배우는 오늘도’는 배우 문소리가 각본 연출 주연을 맡았다. 연기파로 평가받긴해도 맡고 싶은 배역은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데뷔 18년차 여배우의 일상을 들여다본 영화다. ‘트로피는 많고 배역은 없다’-이 영화 포스터의 선전문구가 의미심장하다. 리메이크든 아니든 대한민국 여배우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고, 캐릭터의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영화가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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