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내 의지 아니라 부끄러워 학구파 강동원 선배·노력파 유해진 선배 선배들한테 배우며 연기…좋은 경험으로
“영화 ‘아가씨’ 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좔좔 이야기했거든요. 이젠 자중하려고요. 굳이 제 입으로 말할 필요가.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시원스러운 성격은 여전하다. 하지만 김태리(27)는 1년여 동안 영화계의 분위기를 조금은 익힌 듯 했다. 지난해 데뷔작 ‘아가씨’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하고 나서는 자신의 연기에 대한 평가도 가감 없이 하더니, 27일 개봉하는 두 번째 영화 ‘1987’(감독 장준환·제작 우정필름)을 두고는 “아쉬운 점은 나만 알고 있어야지”라는 귀여운 대답부터 내놓는다.
물론 김태리는 ‘1987’에서도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데뷔작에서 상속녀 주인을 속이는 발칙한 하녀를 연기한 그는 이번에는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는 1987년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역할로 극을 이끈다. 데모보다 미팅에 더 관심이 많은 스무 살 여대생이 서서히 시대의 분위기에 눈 떠가는 과정이, 도화지 같은 김태리의 얼굴에서 하나씩 완성된다.
“부담? 영화를 하면서 그런 걸 느낀 적은 없다. 일단 겪어보려고 한다. 다만 이번 영화는 김윤석, 하정우 선배님이 중반까지 이야기를 이끌고 나면 내가 등장한다. 혹시 흐름이 툭 끊기면 어쩌나, 마치 서로 다른 영화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그런 고민은 들었다.”
주목받는 대작에서 스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작업은 김태리가 데뷔하고부터 지금까지 연달아 맞는 상황이다. 신인으로서 ‘작품복’, ‘감독복’, ‘배우복’이 상당하다.
“작년에 ‘아가씨’로 처음 신인상을 받으면서 수상 소감으로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인연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진심이다. (이름값)센 선배들과의 작업이 오히려 좋다. 신인끼리 만들어가는 영화도 좋지만, 선배들로부터 배우면서 연기하는 경험은 가치 있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의 모습을 가까이 관찰하는 과정은 김태리에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 이번 ‘1987’에서 주로 맞붙은 상대 배우인 강동원도 그런 존재였다.
“강동원 선배는 정말 공부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역사적인 사실을 연기하는 입장에서 정석대로 공부하면서 어떻게 다가갈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깊게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내가 느낀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웃음)”
어떤 배역이든 거뜬히 해내는 것처럼 보여도 김태리에게 모든 연기가 수월하진 않다. 그럴 때면 곁에 있는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삼촌 역으로 만난 유해진과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연기가 할수록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고 물었더니 유해진 선배님이 ‘나도 괴로워. 뭘 어떻게 하겠어, 그냥 하는 거지 뭐’라고 말하더라. 하하! 그러니 나도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
김태리를 포함해 여러 배우들이 모여 만든 ‘1987’은 엄혹한 시대를 딛고 일어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태리는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실존인물들 가운데 유일한 가상의 캐릭터이자, 극의 메시지를 상징한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친 김태리는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는 물론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바로 나”라며 “그동안 내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 돌아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선 1987년 6월 항쟁의 한복판으로 들어서지만 실제 김태리에게 광장에 모여 소리치며 시위한 경험은 있을까. 지난해 말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를 꺼낼 줄 알았더니 그는 “대학 시절 등록금 투쟁”을 이야기했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많은 과 선배 언니들에 이끌려 대학 정문으로 나가서 외쳤다. 등록금을 낮춰달라고.(웃음) 시위는 그때 처음 해봤다. 다같이 즐겁게 소리치고, 도로를 점령하고 걷는 경험이 정말 새로웠다. 그런데 전적으로 내 의지로 한 게 아니라서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다.”
연말과 새해를 ‘1987’과 보내는 김태리의 내년 계획은 빼곡하다. 상반기에 류준열과 함께 한 영화 ‘리틀포레스트’가 개봉하고, 곧바로 첫 드라마인 ‘미스터 션샤인’도 내놓는다. 김은숙 작가가 집필하는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은 김태리는 이병헌과 호흡을 맞춘다. 요즘 촬영에 한창이다.
“올해는 이상하게 모든 게 불안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때가 있을 만큼.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고, 좌불안석이었다. 작년에 많은 상을 받을 때는 실감하지 못하던 부담이 서서히 생겨서인 것 같다. 내년에는 심지어 아홉수가 시작되는데, 정말 큰일이다.(웃음)”
그야말로 쾌속 성장하는 배우인데도 “행복하지 않다”고 엄살을 부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행복은 작은 거에서 오지 않나. 호빵만 먹어도 행복할 때가 있는 법인데. 하하! 고민하다보면 나아길 거라 여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냥 잔다. 자는 게 최고다. 지금까지 만난 감독님들은 대부분 불면증이 있어서 잠을 잘 자는 나를 많이 부러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