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초엔 로맨스가이 이미지로 한계 스펙트럼 확장으로 ‘공조’서 첫 악역 ‘독전’에선 얼굴살 튼 디테일까지 살려
영화 ‘독전’이 7일 전국 누적관객 400만명을 돌파했다. 마약조직의 배후 세력을 쫓는 경찰과 그를 돕는 청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조진웅, 류준열, 차승원, 김성령 등 주연급은 물론 박해준, 진서연, 이주영 등 조연급과 신예에 이르기까지 눈길을 모으는 배우들이 엮어내는 ‘캐릭터 열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가운데 김주혁이 있다. 김주혁은 대중이 이전에 자신에게 지녔던 모든 이미지를 단박에 깨뜨리며 또 하나의 ‘인생 캐릭터’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세상에 없다. 많은 관객은 그의 부재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독전’ 속 그의 모습은 더욱 강렬하다. ‘독전’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생생히 드러내며 여전히 관객 곁에 서 있다. 그의 이름을 ‘스타, 명예의 전당’에 올리는 이유다.
튼 살로 거칠어 보이는 얼굴, 슬립가운에 팬티차림으로 쏘아대는 독사 같은 눈빛. ‘독전’ 속 김주혁의 모습이다. 극중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자라나 악한 처세로 중국 마약시장의 거물이 됐다. 잔혹함과 교활함을 지닌 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그는 이제껏 보여주지 못했던 악역의 최대치를 표현해냈다.
● 인생의 악역
사실 김주혁의 악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흥행작 ‘공조’에서 그는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위조지폐 동판을 탈취하기 위해 남한에 침투해 현빈·유해진과 맞섰다. 하지만 아직은 다소 전형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고, 캐릭터 자체의 전형성이라는 한계도 언뜻언뜻 드러났다.
‘독전’은 그야말로 다르다. 김주혁에게 그런 에너지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관객의 입장에선 이미 늦은 것이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가 ‘독전’에 캐스팅된 건 2016년 말이었다. 김주혁과 친분을 나눠온 ‘독전’ 제작사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는 이미 그를 마음속으로 점찍어 두었다. “언젠가 김주혁을 제대로 된 악역으로 기용하고 싶었다”는 생각이었다. 김주혁은 막상 시나리오를 받아들고는 의아해했다. 그 자신 그 같은 강렬한 악역을 연기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촬영을 시작하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도 김주혁이었다. 그는 극중 캐릭터에 걸맞은 의상과 분장에 대해 신경을 기울였다. 심지어 캐릭터의 우악스러움을 드러내는 설정으로서 속옷을 두고도 제작진과 오랜 시간 논의를 할 정도였다. 1시간 30분에 걸쳐 얼굴 살이 터보이게 하는 분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전’에서 드러난 그의 에너지는 사실 오랜 시간 준비된 것이기도 했다. 1997년 ‘도시비화’로 처음 스크린에 나섰던 그는 2017년 10월30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며 이야기를 이끌었다.
● 로맨스와 멜로의 사이에서
특히 그는 ‘싱글즈’ ‘아내가 결혼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등으로 대표되는 로맨틱 코미디나 ‘광식이 동생 광태’ ‘방자전’ 등 멜로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눅눅하지도 않은 외모와 부드러운 미소로 그는 여성 관객에게 다가갔다.
장진영(싱글즈·청연), 손예진(아내가 결혼했다), 이요원(광식이 동생 광태), 조여정(방자전) 등이 그와 함께했던 배우들. 김주혁은 자신보다 오히려 이들 상대역의 배우들을 더욱 빛나게 했다. 캐릭터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지닌, 혹은 그에게 지녔던 대중의 기분 좋은 선입견이 한몫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와 20여년의 세월을 함께한 소속사 나무엑터스 김종도 대표는 “말 그대로 처음처럼 변함이 없이 한결같은 친구였다”면서 김주혁을 추억한다. 그에 따르면 김주혁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절대 생색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실제 성격이 어느 순간까지 캐릭터와 그 자신의 작품에 상당부분 반영했을 것임을 떠올리게 한다.
김 대표는 1997년 김주혁을 처음 만나 함께 일을 하기로 했다. 김 대표는 한동안 자신의 승용차도 없이 김주혁의 차를 타고 다니며 영화사와 방송사를 찾았다. 2001년 영화 ‘세이 예스’에 출연한 그를 인터뷰할 당시 김주혁은 ‘샌님’ 같았다. ‘대배우’ 김무생이 아버지였음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지만, 또 이를 ‘뒷배 삼으려는 야심’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신인 연기자로서 조심스럽고 또 무척이나 겸손해 했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답답해 보일 지경이었다면 실례일까.
엄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기에 뛰어들었으니 아버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도 언감생심이었을 터이다. 그런 아들을 보며 김무생은 김 대표에게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김주혁은 김무생의 막내아들이었다.
● 막내에서 맏형으로
막내아들의 천진난만함보다는 수줍음 많고 얼마간의 낯가림도 지녔던 그가 달라져 보이기 시작한 건 2013년 11월 KBS 2TV ‘1박 2일’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인터뷰 자리에서도 말수 적었던 그는 어느 순간 ‘구탱이형’으로 불리며 시청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섰다. 좌충우돌하며 어리바리함을 드러내는 그는 때로 멤버들을 이끄는 맏형으로서 리더십의 역할을 다했다.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자청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즈음부터 그는 영화 ‘비밀은 없다’로는 야심 가득한 정치인, ‘공조’로는 악역의 캐릭터,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로는 혁명을 꿈꾸는 지도자 등 다양한 캐릭터를 훑었다. 홍상수 감독과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도 출연하며 영역을 더욱 넓혀갔다. 김종도 대표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1박2일’의 경험이 주혁에게 사회성을 가르쳤다. 후배들이 힘들어 할 때 챙겨주고 상황을 리드하면서 점점 성숙해져 갔다. 신기한 건 계속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는 거다”고 술회했다.
타인에 대한 드러나지 않는 배려와 막내의 순진스러움과 맏형으로서 든든함을 갖췄던 김주혁은 배우로서 이제 온전한 자신의 자리를 다시 한번 꿈꾸던 터였다. 2015년 ‘1박 2일’ 출연 당시 자신의 ‘10년 후’를 상상한 김주혁은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뒤 브래드 피트와 영화에 동반 출연한다”고 말했다. 45년의 길지 않은 세월을 살다 갔지만 그러기 한 달 전 ‘제1회 더 서울어워즈’에서 ‘공조’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그 미래의 꿈에 한 발 더 다가서는 듯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는 결국 관객의 곁에서 그를 데려가고 말았다.
그렇게 떠나가기 전 남긴 마지막 작품인 ‘독전’은 그래서 그를 더욱 추억하게 하고, 그와 아직 이별하지 않았음을 말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