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우비 vs 흰색우비 전설의 빗속 혈투, 그땐 그랬지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10월 12일 06시 57분


H.O.T.와 젝스키스를 지지하는 소녀 팬들의 팬덤은 막강했다. 사진은 1997년 한 가요 시상식 직후 두 그룹의 팬덤이 맞붙은 실제 사건을 묘사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한 장면. 사진제공|tvN
H.O.T.와 젝스키스를 지지하는 소녀 팬들의 팬덤은 막강했다. 사진은 1997년 한 가요 시상식 직후 두 그룹의 팬덤이 맞붙은 실제 사건을 묘사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한 장면. 사진제공|tvN
■ ‘1세대 아이돌’ H.O.T. vs 젝스키스, 20년 만에 콘서트 대결…응답하라 1997!

야자시간 TV 앞 대동단결…주말엔 녹화 비디오 보고 또 보고
팬클럽 모집 탈락에 울고, 오빠들과 만나고 싶어 백댄서 연습
오빠들 마지막 무대, 목청 터져라 이름 불렀지…이제는 추억


마치 시간을 1997년으로 되돌린 듯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가요계를 점령했던 1세대 아이돌 그룹 H.O.T.와 젝스키스가 20년 만에 다시 맞붙는다. 두 그룹은 13·14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각각 콘서트를 열고 피할 수 없는 자존심 경쟁을 벌인다. 2000년과 2001년 각각 두 그룹의 해체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 만큼 이들의 팬들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과도 같다고 한다. 또 이를 두고 ‘잠실 대첩’ 또는 ‘20년만의 리턴 매치’라고 부른다. 당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단순히 대중문화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파급효과를 만들어낸 터라 다시 성사된 ‘빅 매치’에 쏠린 대중의 시선은 상당하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그 ‘전설의 그룹’이 지금 여기 우리 앞에 다시 섰다.

# 1997년 12월 말. 가요시상식 공개방송 입장을 앞두고 행사장 일대는 비장한 기운이 흐른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흰색 우비와 노란색 우비를 쓴 250여명의 ‘소녀 부대’들이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 있다. 육박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부대’는 뒤엉킨다.

2012년 방송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한 장면이다. H.O.T.와 젝스키스로 대변되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오빠’들에 미쳐있던 여고생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현해 화제를 모았다. 특히 이 장면은 당시 ‘팬클럽 회원간 패싸움’이라는 제목으로 각종 사회 뉴스에 등장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뜨거웠던 여고생들은 이제 직장인, 주부, 아기엄마 등으로 살고 있다. 두 그룹이 한날한시에 콘서트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시간이 흘러 없어진 줄로 만 알았던 열정이 다시 가슴 속 저 밑에서 끓어올랐다. 입장권을 사기 위해 몇날 며칠을 은행 앞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다렸던 이들이기에 감히 ‘피켓팅’(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 따위가 발목을 잡긴 해도 오빠들을 향한 마음은 여전하다. ‘클럽 H.O.T.’와 ‘옐로우 키스’로 활동했던 두 그룹의 팬클럽 멤버가 당시를 추억하며 잠시 행복한 시간에 빠져들었다.

그룹 H.O.T.(위쪽)-젝스키스.
그룹 H.O.T.(위쪽)-젝스키스.

# H.O.T. vs 젝스키스

“빛나는 그 이름!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전 저녁시간이 되면 TV 앞으로 모였다. H.O.T.가 ‘전사의 후예’로 ‘가요톱10’에 등장한 후 50여명의 반 친구들은 대동단결, 만장일치 H.O.T.였다. 그때는 H.O.T.라는 글자만 봐도 가슴이 뜨겁고 심장이 튀어 나올 듯한 심정이었는데, 동경하던 미니시리즈 주인공이나 김건모, 이승환, 김원준 오빠들을 좋아할 때랑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주말만 되면 오빠들이 나왔던 방송 녹화 비디오를 몇 번씩 돌아가면서 봤다. 승호(토니안) 오빠가 손짓하는 ‘단지’가 되어 행복의 춤사위를 따라하며 그렇게 학창시절을 뜨겁게 보냈다. H.O.T.라는 글자만 생각해면 가슴 뛰던 첫사랑처럼 강렬한 느낌이다.” (직장인 이모씨·39)

“여섯 개의 수정. 가요계를 찬란하게 빛냈던 6명이다. 3년의 짧은 기간 동안 5장의 앨범을 내는 활동량을 보여줬다. 춤으로 부산에서 연예인 못지않게 유명세를 누렸던 재진 오빠와 재덕 오빠가 안무를 전담하고, 성훈 오빠를 중심으로 지용 오빠와 수원 오빠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보컬을 맡았다. 지원 오빠는 리더로서 메인 래퍼를 담당하며 팀의 축을 이뤘다. 노래와 랩, 댄스의 3박자는 6명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오빠들의 카리스마와 미소, 목소리는 변함없다. 이제는 ‘완전체’ 여섯 개의 수정이 아니어서 속상하고 밉지만, 그때 어린 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젝스키스는 적어도 나에게는 지금도 영원한 여섯 명이다.” (직장인 박모씨·33)

그룹 H.O.T.(위쪽)-젝스키스.
그룹 H.O.T.(위쪽)-젝스키스.

# ‘클럽 H.O.T.’ vs ‘옐로우 키스’

“우리들의 빛나는 아이돌 H.O.T.가 나타나면서 말 그대로 팬덤이 만들어졌다. ‘안승 부인’, ‘칠현 부인’, ‘우혁 부인’ 등 멤버만 달랐지, 모든 여고생들이 H.O.T.에 미쳐 있던 시기였다. 손이 예쁜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을 듣고 매일 손 마사지에 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흰 손을 만들겠다는 친구부터, 댄서가 되어 오빠들을 만나겠다고 거리에 나가서 춤을 배우는 친구까지. 각자의 방법으로 오빠를 만나기 위해 애썼다. ‘클럽 H.O.T’ 2기 모집에서 떨어지면서 기념품을 들고 다니는 애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저 하는 것이라고는 ‘사서함 듣기’, ‘제일은행 줄 서는 법’, ‘클럽 H.O.T.에 가입하는 방법’ 등을 매일 연마했다. 2∼3분짜리 사서함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얼마나 행복했던 지, 그 작은 ‘떡밥’ 하나만으로 하루가 기분 좋아졌다.” (직장인 이모씨·39)

“지금이야 옐로우 키스라고 불리지만 그때만 해도 ‘DSF’로 칭했다. 무엇의 약자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기획사에서 그렇게 정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팬클럽 회원들 사이에서는 회사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불신이 쌓였다. 팬들끼리 더욱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됐다. 회사가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공개방송이나 드림콘서트 등 다른 팬들이 한데 모이는 장소에서는 우리들 때문에 오빠들이 욕먹지 않도록 더욱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단합은 해체 후 오빠들이 우리를 위해 공개한 노래 ‘땡스’에 답가 형식으로 ‘유어 웰컴’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팬들이 직접 작사, 작곡을 하고 녹음 후 발표하는 유례가 없는 역사를 만든 우리들이다.” (직장인 박모씨·33)

H.O.T.의 흰 풍선(위쪽)-젝스키스의 노란 풍선. 사진제공|MBC·YG엔터테인먼트
H.O.T.의 흰 풍선(위쪽)-젝스키스의 노란 풍선. 사진제공|MBC·YG엔터테인먼트

# ‘화이트’ vs ‘옐로우’

“2000년 마지막으로 거대한 흰 풍선 물결을 본 게 그날이었다. 중학생 동생 잃어버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부모님 경고와 함께 갔던 H.O.T 콘서트. 그 콘서트가 흰 풍선을 들고 H.O.T를 외치던 마지막 콘서트가 될 줄 누가 알았으며, 희준 오빠가 울자 뛰어 내려가 버려 결국 동생과 떨어지게 돼 미아 신고를 하고 엄마와 언니에게 호되게 혼났던 그날. 오히려 춤추고 노래하던 오빠들은 3층 시야에서 면봉 보다 작게 보여 기억은 나지 않고 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흰 물결, 해가 져서 깜깜한 밤이 되어도 우주의 신비한 공간처럼 세상을 밝히던 장엄한 흰 물결만 생생하다. 그 누구도 H.O.T.가 만든 장관과 절경을 만들진 못했다. 이제는 흰 구름만 봐도 울컥한다.” (직장인 이모씨·39)

“드림콘서트는 팬들의 자존심 대결 장소이다. 오빠들이 기죽지 않도록 그 어떤 공연장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응원했다. 특히 2000년 해체를 발표하고 이틀 뒤 우리들에게 마지막이 되어버린 드림콘서트에서는 더더욱 지지 말아야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당시 나는 손목이 떨어져나가도 괜찮을 심정으로 풍선을 흔들며 목청이 터져라 오빠들의 이름을 불렀다. ‘기억해줄래’를 함께 부를 때에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오빠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일까봐 얼마나 닦아냈는지 모른다. 지금도 울컥한다. 5만 명의 팬들이 모였다는 이날의 장관은 유튜브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노란 풍선의 물결, 지금의 아이돌 팬들이 야광봉으로 만들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웅장함이 느껴진다.” (직장인 박모씨·33)

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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