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MBC 드라마 ‘아일랜드’를 거쳐 이듬해 ‘내 이름은 김삼순’을 통해 본격적인 대중성의 궤도에 오른 현빈(36)은 남자배우들의 모임에도 초대를 받았다. 그보다 오래 전 데뷔해 위상을 굳힌 장동건도 모임에서 자주 만난 선배가 되었다.
이후로도 만남은 자연스럽게 잦아졌다. 2006년 두 사람은 톱스타급 배우들이 뭉친 야구단 ‘플레이어즈’의 멤버로 그라운드를 함께 뛰었다. 같은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한 두 사람은 한때 위층과 아래층에 집을 둔 이웃사촌으로서 정도 쌓았다. 선배는 후배가 카메라 앞에 나서는 현장을 찾아 격려하기도 예사였다. 후배는 그런 선배에게 다양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진심 어린 조언을 받았다.
이들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10살의 나이차는 연기와 세상과 인생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우정은 지금까지도 오랜 시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스크린 속에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상대가 되었다. 25일 개봉하는 영화 ‘창궐’(제작 리양필름)이 잠시나마 이들의 우정을 뒤로 미루고 적대하게 한 무대다.
‘창궐’은 역병처럼 조선을 무너뜨리려는 야귀(夜鬼)들의 공격에 맞서는 왕자와 세상을 뒤엎어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의 대결을 그린 영화. 현빈은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왕자 역을, 장동건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권력욕을 지닌 병조판서 역할을 맡았다.
짧지 않은 시간, 우정을 나눠온 두 사람이 연기로써 힘을 모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미 그 절친함이 세상에 알려진 바, 이들의 공동출연은 영화계 안팎에서 이미 화제를 모았다.
‘창궐’은 이들에겐 일종의 품앗이 같은 것이기도 하다.
2008년 곽경택 감독이 자신의 영화 ‘친구’를 드라마로 만든 ‘친구, 우리들의 전설’이 그 첫 번째 품앗이의 무대였다. 장동건은 자신이 연기했던 스크린 속 캐릭터를 후배에게 맡겼다. 곽 감독은 “장동건의 추천을 받아 현빈을 만났다. 내가 새롭게 만들어내려는 캐릭터에 어울렸다”고 돌아봤다.
그에 이어 현빈은 ‘창궐’을 장동건에게 소개했다. 현빈은 이미 영화 ‘공조’로 연출자 김성훈 감독과 흥행을 이끌어냈다. 김성훈 감독으로서도 톱스타급 배우의 출연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현빈과 김성훈 감독, 현빈과 장동건의 의기투합이 시작된 시점이면서 두 연기자의 또 다른 품앗이의 작품이 된 셈이다. 장동건은 모든 작업을 마친 뒤 “현빈과는 작품 말고 모든 것을 함께 해봤다”면서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점”이 작품을 선택한 또 하나의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두터운 우정을 드러내듯 두 사람은 17일 오후 ‘창궐’을 처음 선보인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 약속이라도 한듯 나란히 롱코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카메라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지는 가운데 환하게 웃은 장동건과 현빈은 이야기의 절정이라 할 만한 마지막 액션신에 대해서도 자랑했다.
두 사람은 궁궐의 지붕 위에서 처절하고도 치열한, 그야말로 한판 혈투를 벌인다. 장동건은 “감정과 서로의 절박함이 담긴 장면이다”면서 “정말 멋있게 잘 찍혔다”고 말했다.
이를 바라보는 현빈은 흐뭇함으로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빈은 “액션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면서 “초반 왕위와 나라의 안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민초를 만나면서 변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액션신에도 담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김의성은 “두 사람이 펼친 액션신은 정말 최고다”면서 “숨쉬기 힘들 정도로 잘 봤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이제 이들이 펼친 노력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몫이 되었다. 적어도 배우 이전에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로서 나눈 개인적 우정은, 영화 속 대립하는 구도처럼 잠시 뒤로 물러서 있음엔 틀림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나리오 속 인물을 어떻게 형상화할지가 카메라 앞에서는 유일한 고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두드러지게 내세웠듯, 마지막 액션신에서처럼 치열한 연기 대결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는 것도 그런 고민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그래서 이들은 절친한 선후배, 혹은 친형제와 다르지 않는 우정의 이름보다는 적어도 오늘은 ‘창궐’의 주연배우로서 이름에 값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