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때 난 철없는 어른…남일로 치부했었죠 전문 용어 수두룩…경제 전문가한테 과외도 조우진에게서 불꽃 봐…환상의 시너지 발현
“위기가 닥치더라도 원칙과 소신을 지킨다면 재앙이 올까요?”
배우 김혜수(48)의 반문이다. 거창하게는 국가적인 위기부터, 좁게는 삶에서 직면하게 될 숱한 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길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갑자기 위기와 소신, 원칙 같은 무거운 명제를 꺼낸 이유는 새 영화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제작 영화사집)의 영향이다. 1997년 우리 사회에 암흑을 드리운 IMF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는 불과 21년 전 일어난 생생한 현장, 미처 몰랐던 협상의 막전막후를 스크린에 옮긴다.
개봉에 앞서 24일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만난 김혜수는 “내가 꼭 출연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하고, 많은 관객이 보도록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 작품이었다”고 했다.
● “시름, 상실, 박탈, 두려움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꾸준하면서도 과감한 연기활동으로 여러 히트작을 내놓은 김혜수는 최근 좀 더 대담한 도전에 나서고 있다. 스릴러 ‘차이나타운’과 ‘미옥’은 물론이고 코미디 붐을 다시 일으킨 ‘굿바이 싱글’도 김혜수로부터 탄생했다. 이번엔 대다수 국민의 기억에 ‘가까운 현대사’로 남아있는 외환위기의 이야기다. 그는 “각별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국가부도를 일주일 앞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설정 자체가 매혹적이지만, 시나리오를 읽을 땐 정말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외환위기 때 비공개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 한 줄에서 출발한 영화다. 여기에 상상력을 가미한 가공의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맥박이 빨라지고 화가 났다. 내가 출연할 수 있나 없나를 떠나 꼭 만들어야 하는 영화다.”
‘국가부도의 날’은 국민 80%가 중산층이라고 믿고 살던 1997년, 대기업 연쇄부도와 금융기관의 부실로 인해 순식간에 벌어진 국가부도 위기의 일주일을 담는다. 김혜수는 먼저 위기를 감지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이다. 정확한 데이터로 위기를 예측하면서 국가의 위기를 국민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 하지만 그의 소신은 번번이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가로막힌다.
김혜수는 “한시현은 초지일관 원칙대로 움직이는 인물”이라며 “이런 사람이 많았더라면 그 시대를 살아낸 현재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신념과 소신이 일치하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물이라는 데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영어대사 분량도 상당한 데다 경제 전문 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 하는 까닭에 김혜수는 촬영을 앞두고 ‘경제 공부’에 집중했다. 경제전문가로부터 몇 차례 집중적인 과외도 받았다고 했다. 그런 김혜수도 외환위기를 겪은 세대다. 당시를 떠올릴 때면 “꽤 부끄럽다”고 했다.
“성인이었는데도 철없는 어른으로 살았다. 그땐 대중문화가 호황이고 여러 변화가 이어지니 좋은 줄로만 알았다. 나라에 큰 일이 생겼는데도 실감을 못했다. 난데없이 위기가 닥쳤고, 당시 정부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은 실책 때문일까. 내 문제가 아닌 것처럼 치부했던 것 같다.”
때문에 김혜수는 이번 영화에 더 책임감을 가졌다. 외환위기 탓에 직장을 잃고 가정이 해체된 상처를 지닌 이들이 여전히 당시를 또렷이 기억한다는 사실도 그에게 책임감을 지웠다.
“많은 개인과 기업에 비극이 닥친 시기이다. 당시를 살아낸 이들이 느낀 시름과 상실, 박탈, 두려움, 고민을 최대한 생생하게 그리려고 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일 수 있지만, 그걸 되짚으면서 다시는 이런 불행과 위기를 그런 식으로 흘러 보내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잡았다.”
● “우진 씨, 정말 고마워요!”
영화는 네 인물을 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김혜수가 위기를 타파하려 분투한다면, 유아인은 위기를 기회삼아 위험한 베팅을 시작하는 젊은 금융맨이다. 가정과 직장을 지키려는 소시민 허준호, 위기 속에 욕망을 드러내는 재정국 차관 조우진도 있다. 여기에 국제통화기금 IMF 총재 역을 맡은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배우 뱅상 카셀의 존재는 영화를 향한 기대를 높이는 대목이다.
김혜수 역시 함께한 배우들과 자극을 주고받았다. 특히 이번에 처음 만난 조우진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후배이지만 그로부터 받은 자극과 에너지가 상당해 그 여운이 지금껏 이어지는 듯했다.
“사사건건 내 의견을 가로막는 고위간부 조우진과 부딪치는 장면이 특히 많았다. 조우진에게서 불꽃을 봤다. 연기 잘하는 좋은 배우와 같이 연기하는 건 배우에게 굉장히 소중한 기회이다. 조우진의 덕을 많이 봤다. 환상의 시너지를 발현할 기회였다고 할까. 모두가 그의 연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거다. 우진 씨, 정말 고마워요. 하하!”
‘국가부도의 날’은 11월28일 관객을 찾는다. 개봉까지 약 한 달이 남았지만 김혜수는 관객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지 벌써부터 궁금해했다.
“우린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위기에 직면한다. 수없이 많은 위기도 겪어왔다. 정직하게 위기를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을까. 회피하고 외면한다면 그게 곧 재앙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본다. 위기를 겪는 내 삶을, 크게는 우리 사회를 한 번쯤 환기시킬 영화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