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과 함께 찍은 영화가 22편이다. 서로에게 가장 많은 작품을 함께한 감독과 배우였다. ‘배신’ ‘하숙생’ ‘초우’ ‘악인시대’ ‘밀월’ 등 우리 둘이 함께한 영화들은 모두 구름 관객을 모았다.
신성일 하나만으로 10여 년간 한국 영화계를 먹여 살린 적도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 영화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작품은 신성일이 나오는 영화밖에 없었다. 한국 영화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들인 배우가 신성일이다. 지금은 세대교체가 되고, 잊혀 가지만 신성일은 잊을 수 없는 배우다.
신성일은 동료를 먼저 생각하는 영화인이었다. 영화 ‘하숙생’을 찍을 때 일이다. 시나리오가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콘티도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배우 신성일과 김지미를 섭외했는데 일주일간 촬영을 미루자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쁜 그였지만 “스케줄을 맞춰 달라. 잘못하면 고소당한다”는 나의 부탁에 어떻게 해서든 일정을 조정해줬다. ‘하숙생’이 최고의 히트를 치면서 우리는 자타 공인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신성일은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서도 나를 제일 친한 친구라고 꼽았다.
자존심이 강하고,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 않는 자부심이 있는 친구였다. 그럼에도 신성일은 나이는 같지만 영화계 선배인 나를 늘 깍듯하게 대했다. 1960년대에는 경기 양평군 팔당교 밑에 펄이 있었다. 그곳에서 부인이 된 엄앵란과 러브신을 찍기로 돼 있었는데 약속 시간인 오전 8시까지 촬영장에 나오지 않았다. 전날 콘티에도 없는 내용을 배우들에게 급하게 보내줬기 때문에 대사를 외우고 오느라 늦었던 것이다. 고집 센 젊은 감독이었던 나는 신성일에게 기합을 주려고 “물에 헤엄쳐서 나와”라고 지시했다. 당시 늦가을의 추운 날씨였다. 그럼에도 신성일은 군말 없이 지시를 따랐고, 벌벌 떠는 채로 영화 촬영을 이어갔다.
엄앵란과의 숨겨진 로맨스도 잊을 수 없다. 춘천의 호수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카메라는 아주 먼 곳에서 롱숏으로 찍었다. 배에 단둘만 있는 그들에게 키스를 하는 척만 하라고 했는데 진짜 키스를 했다. 이후 결혼까지 성공하면서 주위에선 “중매쟁이는 정진우 감독”이라며 껄껄 웃기도 했다.
지난해 내게 마지막으로 영화 하나를 만들자고 했다. “그래, 우리가 늙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해보자”고 답했다. 그런데 며칠 뒤 전화해 폐암이라고 전했다. 다음 날 우리가 즐겨 찾던 제주도의 횟집에 갔다. 웬만한 사람은 쓰러지는 항암치료인데 자신은 멀쩡해서 자신 있다고 말했다. 절대 저 사람은 죽는다는 생각을 안 해봤다. 그런 그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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