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때문에 등록금 없어 대학 미뤄 무작정 서울 올라와 연극 공부했죠 16년간 무명…작품 쏟아져서 행복 스트레스 풀 때는 ‘혼술’이 최고죠
고백컨대 ‘수다’라는 타이틀과 배우 조우진(39)은 어울리지 않았다. 예상은 했으나 역시.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할 말만 간결하면서도 느릿하게 이어가는 그와 나눈 인터뷰를 수다로 분류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이번 ‘여기자들의 수다’만큼은 그 이름을 ‘조우진과의 진지한 대화’쯤으로 바꿔야 한다. 지금 영화계에서 조우진은 가장 바쁜 배우로 통한다. ‘탁월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연기력으로 관객은 물론 함께 연기하는 동료 배우들까지 사로잡고 있다. 영화 한 편을 끝내면 또 다른 영화 촬영이 기다리고 있는 그를 ‘여기자들의 수다’에 초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기다림 끝에 영화 ‘국가부도의 날’ 개봉을 앞두고 짬을 낸 그와 마주앉았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그에게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온기’가 느껴졌다.
-1년 사이에 개봉한 영화가 네 편이고, 촬영을 마친 영화도 세 편이나 된다.
“작년엔 더 했다. 개봉작만 아홉 편이었다. 힘들다기보다 부담과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런 스케줄이 가능한가.
“워낙 오랫동안 작품이나 배역에 목말랐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조우진은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을 통해 대중에 각인됐다. 의자에 묶인 상대역 이병헌의 다리를 쳐다보며 “여, 썰고! 또 저, 썰고!”라고 내뱉는 섬뜩한 대사는 이 영화를 본 900만 관객의 뇌리에 박혀 쉽게 잊히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단박에 이름을 알리고 꼬박 3년이 지났다. 그 사이 조우진은 ‘1987’ ‘강철비’ ‘남한산성’ 등 흥행과 완성도를 고르게 평가받은 영화에서 실력을 증명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도깨비’에도 참여해 인지도를 높였다. -온라인 검색 창에 하루 몇 번이나 조우진을 검색하나.
“음…. 자주하진 않는다. 인터뷰를 많이 하는 시기라면 혹시 어설픈 사진은 없나 찾아본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사는 다 읽는 편? 가려 읽는 편?
“사람의 시선은 다 다르지 않다. 잘 안 본다. 어떤 걸 의식해서라기보다는 그냥 태생적으로 그렇다.(웃음)”
-인기는 체감하나.
“반응이 달라진 건 느낀다. 아! 얼마 전 너무 웃긴 일이 있었다. 평창에서 영화 ‘전투’를 찍었던 중이었다. 매니저와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식당 이모님이 계속 우리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쳐다보는 기운이 느껴졌다. 눈이 딱 마주쳤는데, 이모님이 ‘꼭 조우진을 닮았네’라고 하더라. 하하! 불고기 먹던 매니저는 그 자리에서 빵 터졌다.”
-그때 뭐라고 답했나.
“아, 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했지.”
-30대 중반에 유명세를 얻어 데뷔 초에 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
“1997년 어른의 세계에 들어왔다. 내 꿈은 뭔가 싶었지. ‘나’를 찾자,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 고민이었다. 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쉽게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 남의 시선으로 내가 평가받는 일을 찾았다. 어떤 개똥철학 같은 거였는데(웃음), 그런 고민 끝에 연기라는 결론을 얻었다.”
조우진은 1999년 연극 무대로 데뷔했다. 이후 줄곧 연극에서 활동하면서 간간히 영화와 드라마 단역과 조연으로 나섰다. 무명배우의 삶이다. ‘내부자들’을 만나기 전까지 16년 정도 그런 시간을 묵묵하게 보냈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거뜬히 해내는 저력은 바로 그렇게 차근차근 쌓인 셈이다.
조우진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통해 또 한 번 실력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1997 년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이 국가 부도 사태에 어떻게 맞서는지 그리고 있다. 1997년 그리고 IMF는 조우진 개인에게도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자 전환”이라고 했다.
“1979년 1월생이다. 예정대로 대학에 갔다면 97학번이 됐을 거다. 그 즈음 막연하게 ‘가세가 기울고 있다’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 입학 등록금이 없었다. 그 때는 요즘처럼 학자금 대출도 거의 없었고. 어려웠다. 그 다음 해에도 대학엔 못 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 싶었다.”
-결심이 선 뒤에 어떻게 했나.
“1999년 대학 연극과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 준비가 미흡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엄청 속상했다. 인생의 큰 실패였으니까. 고향인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일단 서울서 연극 공부를 해보자고. 극단 워크숍에서 배우면서 무대에 올랐다. 그 다음해 대학(서울예대)에 입학해 00학번이 됐다.”
-연기할 때 발음이 월등하다. 역할마다 화법, 호흡을 달리하는 것도 능숙하고.
“딕션은 고등학교 방송반 활동의 영향이다. 하하! 아나운서였는데 고등학생이지만 명색이 방송반이니까 사투리는 쓰면 안됐다. 발음 지적을 엄청 받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지금의 발음은 그런 상처를 극복한 결과물인가보다.
“훈련하고 노력을 보태니까 자연스럽게 쌓이는 건 있다. 뭐든지 경험이 쌓이면 덜 어설프게 흘러간다.”
-노력형? 천재형? 어느 쪽인가.
“뭐가 됐든, 노력형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엄격한 편이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조우진은 지난 10월 결혼했다. 11년간 교제한 연인과 웨딩마치를 울렸다. 결혼하기 전 이미 미래를 약속한 두 사람은 얼마 전 돌이 지난 딸도 있다. 요즘은 사적인 생활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배우도 많지만 조우진은 아직 그런 상황이 낯선 듯했다. 내성적인 성향도 한 몫을 한다. 관찰예능은 절대 못할 것 같은 느낌이다.
-평소엔 뭘 하며 지내나.
“시간과 마음이 허락하면 촬영 때문에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다가 집에서 ‘혼술’도 하고.” -혼술? 주종은?
“소주나 와인. 주종은 안 가린다.(웃음) 혼술하면서 유튜브도 본다. 요즘 사람들이 뭘 좇는지 보이더라. 스트레스 풀 땐 운동도 한다. 영화 촬영장에서 뛰기도 하고.”
-운동과 술 얘기를 들으니, 배우 유해진과 겹치는 느낌이다.
“아우∼ 유해진 선배님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내공의 소유자이지.”
-주변 사람들 말로는 책도 많이 본다는데.
“꼭 그렇진 않다. 요즘은 촬영이 많아 읽질 못한다. 한창 읽을 땐 소설이나 수필 두세 권을 두고 동시에 읽었다. 그렇게 하면 주관적인 의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도 생긴다. 우리 일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지 않나. 필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 연기로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라 최대한 텍스트를 가까이 하려 한다. 이런 말을 하다보니…. 요즘 책을 너무 안 읽었구나, 급 반성 중이다.”
-그런데 말투는 원래 이렇게 느린가.
“동향 사람들은 나더러 말 좀 빨리 하라고 언성을 높인다. 하하! 드라마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할 땐 이응복 감독님이 내 말이 빠르다고, 천천히 하라더라.”
조우진은 그 느릿한 말투로 “수고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꺼냈다. “수고로워야 결과물이 좋다”는 말이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캐릭터를 맡을 때가 많았다. 가방 끈도 짧고 경험도 없는 내가 그런 역할을 어떻게 표현할지 걱정됐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관찰이다. 검찰청 사람들이나 금융감독원 직원들의 회식 한쪽에 양해를 구하고 앉아 있기도 했다. 숨은 고수 느낌의 변호사를 찾아가 읍소도 해봤다. 관찰해 취재한 걸 데이터로 쌓아 연기에 녹여내는 거다. 그게 내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