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감동적인 순간이 탄생했다. 연기 경력만 50년인 배우 김혜자가 현역 배우로서 백상예술대상 TV부문의 대상을 받은 것이다. “어떡하지”라는 말을 반복하며 소녀처럼 수상에 기뻐하던 이 노배우는 드라마 tvN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엔딩에 나왔던 자신의 내레이션을 다시 한번 읽어주며 그 자리에 있던 청중뿐 아니라 시청자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줬다.
김혜자는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D홀에서 열린 제55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눈이 부시게’로 TV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날 우아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김혜자는 소녀처럼 순박하고 솔직하게 감독과 시청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시청자 여러분께 너무 감사하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 살고 있는 것 같다. 얼마나 인생 드라마를 방송해 주셔서 고맙다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는지, 정말 시청자 여러분께 꼭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라고 특별히 드라마를 시청해준 시청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내가 탈지 안 탈지 모르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뭐라고 인사말 하나 하려다가 여러분이 많이 좋아해준 내레이션을 해야지 했는데 아무리 외워도 잊어버린다. 그래서 대본을 찢어서 왔다”며 종이 쪽지를 하나 꺼냈다.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회 대본, 마지막 장이었다.
이어진 김혜자의 내레이션에 시상식장은 감동으로 가득찼다. ‘눈이 부시게’는 치매에 걸린 한 여성의 관점으로 쓴 드라마. 시간을 바꿀 수 있는 시계 때문에 자신의 젊음을 잃었다 생각한 혜자(20대 역 한지민 분)가 노인으로서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후 실제로는 혜자가 치매에 걸린 노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반전’으로 충격과 감동을 준 작품이다. 이 같은 내용을 통해 이 드라마는 유한한 인간의 시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제시했고, 김혜자는 겉은 70대 노인이지만, 내면은 20대인 ‘혜자’를 훌륭하게 연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김혜자가 소감을 갈음한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김혜자는 중간에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시 대본을 보기는 했지만, 대부분을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혜자가 된 것처럼 유창하지만 진실되게 읊었다. 또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라면서 마지막 고마움을 표했다. 김혜자의 이 같은 수상 소감에 후배 배우들은 눈물을 흘렸다. 김혜수와 이성민, 김민정 뿐 아니라 ‘눈이 부시게’로 한 한지민과 이정은 역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선배 배우의 따뜻한 수상 소감에 감동했다.
제55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화면 캡처
김혜자의 내레이션이 이토록 큰 힘을 발휘한 이유는 ‘눈이 부시게’ 속 대사가 한지민과 2인1역을 선보였던 주인공 ‘김혜자’의 대사일 뿐 아니라 배우 김혜자 개인의 이야기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빛나는 56년의 연기 경력, 오랜 시간 세월의 풍파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온 배우의 가치가 시상식장의 짧은 소감 하나로 증명됐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