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랭 “아티스트, 좋은경험 나쁜경험 다해봐야한다”

  • 뉴시스
  • 입력 2019년 7월 12일 14시 13분


팝아티스트 낸시랭(40)이 ‘스칼렛’(Scarlet·주홍)으로 다시 태어난다. 2017년 12월 왕진진(39·전준주)과 혼인신고 후 사기결혼과 가정폭행, 리벤지 포르노 등으로 고통 받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낙인처럼 찍힌 주홍글씨를 애써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경험을 한 전 세계 여성들을 다양한 사회·문화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물음을 던지고 싶다. 결혼에 실패한 ‘이혼녀’라는 아픔을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낸시랭은 올 1월 3년 만에 연 개인전 ‘터부 요기니-할리우드 러브’를 성황리에 마쳤다. 터부 요기니는 낸시랭의 대표작이다. 명화 얼굴과 로봇 몸체, 명품 가방 등을 결합한 작품은 현란한 ‘로봇 여전사’ 같은 느낌을 줬다. 17일부터 열리는 ‘2019 글로벌 아트페어 싱가포르’에서는 개인전과 함께 퍼포먼스 ‘스칼렛’을 선보인다. ‘터뷰 요기니’와 마찬가지로 낸시랭의 예술적 자아다. 영화 ‘주홍글씨’(감독 롤랑 조페·1995)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낙인이 찍히다’라는 뜻이 내포됐다.

“글로벌 SNS 시대에 버튼 하나로 성 동영상, 몰카 등이 세계로 순식간에 퍼지지 않느냐. 아나운서 한성주, 가수 백지영, ‘카라’ 출신 구하라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여성 연예인들은 이미지 타격이 크다. 백지영씨는 뛰어난 실력으로 극복, 전성기 때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언제 그런 일을 당했나?’하는 생각이 안 날 정도다. 아티스트도 같은 맥락으로 힘든 일을 극복하면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 나도 팝아티스트 낸시랭 이전에 한 여성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는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있다. 결혼생활에서 불가항적으로 일어난 시련을 겪으며 전 세계 여성들이 받는 불합리한 고통을 고민하게 됐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을 강조하면서 “선동하고 싶지 않다. 한 여성으로서 가족의 결핍에 굶주려 결혼했는데, 전 남편에게 입은 일련의 상처들과 이혼녀라는 낙인은 고통 받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계속 이어진다. 전 세계에는 수많은 ‘스칼렛’이 존재할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낸시랭은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과거 연예인들이 성 동영상 협박 사건 등을 겪으면 칩거했지만, 낸시랭은 아티스트로서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9월 세계 5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이스탄불 아트페어’에 참여하고 서울 반포동 AB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3월 선보인 작품보다 좀 더 업그레이드된다. 터부 요기니 시리즈에 꽃 이미지를 추가, 여성성을 부각시킬 예정이다. 10월에는 프랑스 파리 ‘컨템포러리 아트쇼 바이 WIA 아트페어’에 참여하고 현지에서 개인전도 연다.

한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다. 아직도 상처가 모두 치유되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게 동기부여가 된 데 감사한 부분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아티스트는 좋은 경험, 나쁜 경험 다 해봐야 한다”며 “예전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힘든 일을 겪기 싫어서 인정하지 않았다. 20대 때부터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돼 작품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다고 외쳤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낸시랭은 홍익대 서양화과 출신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고 인지도가 높은 아티스트로 꼽힌다. 작품 가격은 크기, 종류에 따라 750만~5000만원대로 다양하다. 각종 이슈와 얽히며 자신의 작품이 ‘평가 절하되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은 없을까. 방송에서 말만 하면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장악하고, 악플 폭격을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문화적인 코드가 있어서 은유적으로 말해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데,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해 대중들이 불편해하고 나에 대한 편견도 만들어졌다”면서도 “사생활적인 부분이 너무 심하게 공론화됐다. 두 달 가까이 모든 방송에서 다루고, 인터넷 기사가 하루에 100개씩 쏟아져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화려한 퍼포먼스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수영복을 입은 채 바이올린 켜는 퍼포먼스로 처음 대중에게 각인됐다. 당시 축제에 초대 받지 못한 무명의 아티스트였다. 오직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꿈과 열망이 컸다.

“당시 우리 집이 망했을 때”라며 “베니스 비엔날레가 2년 만에 열리는데, ‘꿈과 갈등’이라는 주제가 와 닿았다. 원래 꿈은 패리스 힐튼처럼 돈 막 쓰면서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것이었다. 집이 망하고 아티스트라는 꿈과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설명했다.
2010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여왕 생일 퍼레이드에서 ‘거지여왕’ 퍼포먼스도 펼쳤다.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아 현지 경찰에게 강제 이송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술행위를 정치적 혹은 선정적이라고 바라보는 이들도 없지 않다.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 세계 아티스트들이 문화, 정치, 사회적 담론을 작품으로 표현해 목소리를 외쳤다. 정치·경제적으로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느냐. 정치, 종교인들이 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 세계 모든 아티스트들이 자신이 겪은 고통과 기쁨 등을 표현한다. 나 역시 오랜 시간 작가로 활동하며 ‘터부 요기니’로 많이 보여줬다. 작품으로 영향을 주면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느냐. 각자의 롤이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교 선배인 강형민 작가와 작업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러 가지 좌파적인 성향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했고, 마르크스 이론 책 등도 읽으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며 “2013년 ‘낸시랭과 강남친구’라는 개인전을 열었는데, 그때는 정치적인 성향이 보였다. 좌·우파를 나누는 게 아니라 박근혜·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경쟁을 펼칠 때였는데 모든 정치인 어깨에 고양이 ‘코코샤넬’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팝아트는 오일 페인팅으로 하면 안 된다’는 공식 아닌 공식이 있다. “팝아트는 아크릴 물감으로 해야 하는데, 도전하고 싶었다”면서 “정통 유화 기법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즉 콘셉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짚었다.

세계를 누비고 있는 그룹 ‘방탄소년단’(BTS)을 예로 들었다. “정신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한류스타는 문화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 끼칠 수 있다. 다른 아이돌 그룹과 달리 자신들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사랑, 이별 이야기만 하지 않고, 콘셉트가 분명하면서 가사가 깨어있다. 그래서 BTS는 빌보드 1위를하는 세계적인 셀러브리티가 된 거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아트를 하고 있다.”
낸시랭과 ‘코코 샤넬’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왼쪽 어깨에 고양이 인형 ‘코코샤넬’을 얹은지 어느덧 12년째다. ‘전략적으로 계획한 것 아니냐’고 의심하지만, 운명적으로 만났다. 원래 왼쪽 팔에 얹고 다녔는데, 어깨에 올리니 가슴에 안착이 돼 편했다. 17년 암 투병 끝에 2009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연결고리라면서 “이제는 분신 같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무남독녀인 낸시랭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항상 해외에 나갔다. 집에는 외할머니, 상주하는 아주머니, 과외선생님, 기사 아저씨뿐이었다. 사람이 있어도 외로웠다”며 “엄마가 고양이를 못 키우게 했는데, 일본에 전시 일정차 갔을 때 수제인형가게에서 코코샤넬을 봤다. 많은 명품 고양이 사이에서 코코샤넬만 불쌍하게 보였다.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 같아서 선택했다. 당시 10만원을 주고 구입했는데 열두 살이 됐다. 런던, 파리, 도쿄, 미국 등 전시, 여행, 방송할 때 어디든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속 장미같은 존재다. 10년 넘게 세탁을 해 눈알도 망가지고 털도 많이 빠져 새 인형으로 교체할 법도 한데, “인형가게에 가서 똑같은 인형을 살 수 있지만 코코샤넬은 오직 하나”라며 “엄마가 내 곁에 있는 것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언니, 나 덕분에 유명해졌잖아. 그만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 같다며 “코코샤넬의 노고를 작품에 녹이고 싶다. 코코샤넬도 터부 요기니화시키고 싶다”고 바랐다.
요즘은 영화배우 하정우(41), 탤런트 정려원(38), 구혜선(35), 가수 솔비(35) 등 많은 스타들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하정우는 홍익대 김종근 교수를 찾아가 기초부터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인정하는 아티스트는 하정우씨 밖에 없다. 미술 업계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미 배우로서 높은 위치에 올랐지만 10여년 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교수님을 찾아갔다고 하더라. 시작부터 멋있다. 그렇게 한 연예인이 없었으니까. 대부분 연예인들은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리거나, 이미지를 고급스럽게 하려고 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고 전했다.

낸시랭에게는 팝아티스트 외에도 방송인, 머슬마니아, 셀럽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유튜브 채널 ‘모이라’에서 친한 영화사 대표, 변호사 동생과 여성들의 사연을 받고 상담도 해준다. 요즘은 셰프, 의사, 변호사 등 많은 전문가들이 방송활동을 하고 있다. “내 뒤로 누가 나와주길 바랐는데, 미술계 쪽만 없다. 아주 이상한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대미술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면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다. 미술계 사람들이 나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미술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작가들이 다양한 콘셉트를 가지고 자기 생각을 펼치는데,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다만 ‘개인적으로 얘가 싫다’는 이해한다. 취향이니까. 개취(개인의 취향)라고 하지 않느냐. 하하.”
낸시랭은 꾸준히 선행도 하고 있다. 2년 동안 부천국제영화제 집행위원을 지냈고, 국제아동돕기연합(UHIC)과 사단법인 한국아동치료협회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내년에는 아프리카에서 아동들을 위한 미술치료 및 퍼포먼스를 할 계획이다.

낸시랭은 작품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사랑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듯 보였다.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솔직히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남성은 무섭다”면서 “가족에 대한 결핍이 너무나 컸다. 너무나 간절하게 가정을 이루고 싶었는데, 포기하자고 마음 먹었다. 혼인신고만 하고 웨딩사진을 찍거나 결혼식도 못했지만, 앞으로 다시는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속고 있는 와중에도 (왕진진을) 사랑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 내 재산인 한남동 집을 담보로 빼먹고 사채까지 썼다. 낸시랭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신분 세탁, 상승하고 싶은 욕심이 있지 않았을까. 1부터 100까지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어떻게 쉽게 속을 수 있느냐?’고 하지만 조직적으로 접근해왔다. 고 장자연씨 편지도 위조하지 않았느냐. 수백장의 편지를 보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글씨체나 내용 등 너무 실제처럼 보인다. SBS도 속지 않았느냐. 나 말고도 피해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앞으로 나와 같은 피해자가 또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철저하게 사회와 격리돼야 한다. 그 동안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분당=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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