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연기인생 30년 믿기지 않아 촬영 땐 늘 긴장…초심으로 돌아가 동반 출연 하정우 마동석에 큰 자극 기생충의 아카데미 본상 나도 응원
내년이면 배우로서 30년. 청춘스타로 출발해 한류스타가 됐고,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았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시간, 배우 이병헌(49)은 뜨거운 인기만큼 우여곡절도 몇 차례 겪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평가가 있다. 다름 아닌 ‘연기’다. 2012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2015년 ‘내부자들’, 지난해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거치며 대중의 기대를 뛰어넘는 활약상을 펼친 덕분이다.
19일 개봉한 영화 ‘백두산’(감독 이해준 김병서·제작 덱스터스튜디오)에서도 어김없다. 한반도를 사라지게 만들 백두산 화산 폭발의 아비규환에서 단연 빛나는 인물, 이병헌이 연기한 리준평이다. 이날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의 눈에선 긴장과 기대의 빛이 교차했다.
●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
이병헌은 수십편의 작품에 참여하면서 들을 만큼 들었는데도 여전히 ‘연기 잘 한다’는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30년이 됐다니까(웃음), 정말 징그러울 만큼 믿기지 않네요. 데뷔 1년 밖에 되지 않은 기분으로 연기하려고 합니다. 촬영장으로 향할 때 긴장도 되지만, 요즘은 기대가 더 커요. 한 작품, 한 작품으로 살아가니까요.”
이병헌은 제작비 260억 원대 재난블록버스터를 책임지는 배우로서 매 순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지만 재난영화 출연은 처음이다.
“공포물이나 재난극은 선뜻 손이 안 갔어요. ‘백두산’은 조금 달랐어요. 늘 봐온 재난이 아니라 재난을 해결하려는 두 인물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정을 쌓아가는 버디무비의 성격이 강하잖아요. 합이 잘 맞는다면 재미있는 재난영화가 나오겠다 싶었어요.”
이병헌은 ‘백두산’을 통해 명불허전의 연기력을 다시 한 번 과시한다. 영화 제작진의 ‘신의 한 수’도 북한 무력부 소속 이중스파이 리준평을 이병헌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상대역인 하정우을 비롯해 마동석, 전혜진, 배수지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영화가 끝까지 힘을 유지하는 힘은 이병헌으로부터 나온다.
‘백두산’에 참여한 제작진과 배우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병헌은 철저하리만치 꼼꼼한 준비로 스태프까지 긴장케 했다. 아이디어를 내면서도 두 감독의 뜻에 맞췄다. 때때로 현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배우가 있지만 그는 ‘건강한 대화법’을 추구했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에너지를 쏟아낸 작품이지만 아쉬움이 없을 순 없다. 이병헌은 솔직담백하게 ‘백두산’의 단점도 짚었다. 시각특수효과의 완성도가 관객의 눈높이에 맞을지, 하정우와 불가능한 작전을 실현하면서 드러내는 감정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 등이다.
● ‘남산의 부장들’부터 드라마 ‘히어’까지
이병헌이 올해 촬영을 마친 영화는 한 편 더 있다. 내년 1월 개봉하는 ‘남산의 부장들’이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이야기다. ‘광해’에 이어 실존인물에 다시 도전하는 이병헌은 이어 송강호와 손잡고 영화 ‘비상선선’ 촬영을 시작하는 한편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히어’에도 출연한다. “하던 대로 할 뿐”이라지만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않는 행보다.
“한 편을 찍고 나면 몇 개월 쉬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마음처럼 안돼요. 늘 ‘재미있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요. ‘남한산성’에서 신념을 가진 두 인물의 대결마저 저한테는 재미로 다가왔어요.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어떤 역할과 캐릭터든 중요하지 않아요.”
‘백두산’ 개봉을 앞두고 이병헌은 한동안 미국에 머물렀다. 마침 영화 ‘기생충’이 북미에서 개봉한 시기였다. 현지에서 봉준호 감독과도 만났다는 그는 “현지 영화관계자들의 ‘기생충’에 대한 평가가 대단한 수준”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아카데미상 투표권을 가진 미국 영화예술아카데미협회 회원이기도 한 이병헌은 이미 2017년 한국배우로는 처음 시상자로 시상식 무대를 밟았다. ‘지.아이.조’, ‘매그니피센트7’ 등으로 할리우드에서 기반을 닦은 그로서는 ‘기생충’을 바라보는 마음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외국어영화상 뿐 아니라 본상까지 넘보는 위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한국영화인으로서 정말 뿌듯해요. 당연히 저도 욕심나는 일이죠. 누군가 첫 발걸음을 떼면 다음에 도전하기가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