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선 페이스북 글 |
누구나 로망은 있다. 연예계 데뷔할 때 고향 선배는 내게 충고하길, 여배우로 살아가려면 고독을 운명처럼 여기고 고독을 벗 삼아야 한다고 했다. 즉. 연애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는 거다. 돌이켜보면 선배 충고가 틀렸다. 여배우로 성공하려면 세상 무서운 것도 경험하고, 이놈저놈 만나 다양한 사랑도 해보고 깨지고 부딪치고 피 터지는 아픔도 겪어봐야 찐 연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충고 했어야 했다. 본능에만 충실했다. 주연 배우에서 단역 배우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괜찮다, 감사했다, 이게 어디냐. 난 아이 굶기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미혼모였으니까. 임신 소식을 듣고 아이 아빠는 그랬었다. 아이 낳지 마라, 난 책임 못 진다. 정 낳겠다면 제주도 고향 가서 낳고, 뱃놈을 시키던 해녀를 시키던 하고, 난 책임이 없다. 책임 같은 거 묻지 마라. 청천병력 같았다. 그와 보낸 그 시간들, 그가 내게 말했던 달콤한 속삭임들과 내게 했던 말들이, 그 추억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섬 처녀 신인배우를 꼬셔내기 위한 거짓이었다니. 아이 아빠는 그렇게 임신 2개월 때 날 떠났다. 그렇게 끝났다. 숨어 지내다 만삭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종일 구토와 설사를 했고,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사랑하는 내 언니는 달리는 트럭 속으로 날 잡고 울면서 뛰어 들어갔다. 같이 죽자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배신하고 그렇게 눈물로 미소를 낳았다. 백일이 되는 날 연락 두절된 미소아빠는1년 만에 고향으로 아기백일을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내왔다. 미소 아빠를 만나고 싶었다. 옛말에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닮아도 너무 닮았다. 쌍둥이처럼.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미소가 4개월이 됐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그 아이를 내 눈 앞에서 어이없이 뺏겼다. 친부가 아기를 보고 싶어 하니 3일간만 할머니에게 아기 맡기고 친구들과 사냥 여행하러 충무가자, 함께 가자, 너도 애 낳고 그간 힘들었을 텐데 좀 쉬고 얘기도 좀 하자며 그를 사랑했고 또 믿었기에 고마운 마음까지 생겼었다. 아기를 그에게 의심 없이 넘기고 그렇게 충무여행을 갔다. 하룻밤이 지나고, 그의 일행들은 사냥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산속에서 밥 짓고 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아이 아빠는 단둘이 얘기 좀 하자며 지프차에 날 태워 더 깊은 산속으로 가더니 잠시 후 내리라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더니 어렵게 말을 했다. “부선아 너는 처녀고 나는 유부남이잖아. 난 이혼만은 죽어도 못해준다. 아내가 있고 아들이 둘이다. 그들을 버릴 수 없다. 미안하다. 너가 이 아이 행복을 위해서 아기의 미래를 위해서 아기를 잊고 살아라. 넌 새 출발해라. 결혼도 하고 잘 지내려면 돈이 필요할거다. 엄마가 목돈 준다더라.” 그렇게 돈 받고, 아기 보내고, 처녀처럼 내숭떨고 살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라는 말을 했었다. 망연자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기 아빠에게 피 흘리는 짐승처럼 소리치고 대들었다. 무슨 소리냐. 너 미치지 않았냐. 당장 아기 내놔라. 고향집 당장 내려간다. 내가 씨받이냐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소리치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는 주저 없이 사냥용 엽총 개머리판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퍽하고 쓰러진 내게 총부리를 내 얼굴에 갖다 댔다. 쏴 죽여 버린다고, 따르라고, 어미 자격 없다고, 감히 누구에게 소리 지르냐며 얼굴 형태를 알 수 없게 총으로 맞았고, 쓰러진 내게 분이 안 풀렸는지 남자의 손과 등산화 신은 발로 나는 죽도록 맞았다. 간신히 도망쳤다. 눈물로 낳은 아기. 내 딸 미소와 나는 그렇게 4개월 만에 어처구니없이 생이별을 당했다. 지옥 같은 15개월이 지났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성북동 딸 친가와 아이아빠 집을 오가며 짐승처럼 그들 집 앞에서 아기 달라고, 내 아기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신음하고 소리쳤다.1 5개월 후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아기를 보내준다며 그들은 항복했다. 변호사 사무실로 나오라 했다. 아기는 지하주차장에 있다며 아기 만나기 전 반드시 서명을 해야 한다면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읽어봤고 즉시 서명했다. 그 내용은 1, 위자료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2, 양육비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3, 아이 아빠를 다시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내가 오천만원을 지급한다 등등이었다. 난 주저 없이 서명했다. 그게 1990년 봄이었다. 그런 세월이 벌써 30년째다. 그런 지독한 세월을 나쁜 짓 안하고 단역하고, 노동하며 딸과 죄인처럼 숨어살았다. 재벌가 아이 아빠는 단돈 1원도 지원하지 않았다. 내용증명 각서에 서명 했다는 법적 근거로 그 후 아이 아빠는 미국으로 부부여행 떠났고, 거기서 또다시 낯선 여인과 눈이 맞아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했고, 딸을 또 낳았다. 충격이 연속이었다. 미혼모의 삶. 나홀로 아이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산다는 거 결코 녹녹치 않았다. 연애는 사치였다. 미소를 대학까지 보낸 후 내 삶은 책임과 긴장에서 조금 풀렸다. 딸과 조카 나 셋이 살다가 조카애가 독립을 했고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하여 나갔다. 미소도 함께 따라갔다. 내 딸과 날 물고 뜯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아,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만 돌을 던지라. 오늘은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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