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음악감독 “‘오징어게임’에 삽입된 ‘핑크 솔저스’, 외면 당한 곡인데…”

  • 뉴시스
  • 입력 2021년 11월 2일 10시 58분


뛰어난 음악은 느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생각의 문을 닫고 나온다.

김성수 음악감독의 음악이 그렇다. 작곡이든 편곡이든, 김 감독은 몸의 음악과 머리의 음악에 모두 능하다. 뮤지컬, 대중음악, 드라마 등 전방위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이유다.

고등학교 시절 록밴드에서 기타리스트를 담당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그는 다양한 음악 장르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인디 뮤지션 조휴일의 1인 밴드 ‘검정치마’의 앨범 ‘팀 베이비(TEAM BABY)’에 참여했고, 가수 서태지의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30인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뮤지컬 데뷔작은 2002년 뮤지컬 ‘포비든 플래닛’.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강렬한 편곡과 오케스트라 지휘로 눈도장을 받은 뒤 공연 창작진으로는 이례적으로 마니아를 몰고 다녔다.

‘페스트’(서태지)·‘광화문연가’(이영훈)·‘미인’(신중현) 등 거장들의 주크박스 뮤지컬도 그가 도맡았다. ‘꾿빠이, 이상’ ‘베니스의 상인’ 등 음악 창작에 참여힌 크레디트에는 작곡가 예명인 ‘23’을 병기한다.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OST 크레디트에도 23이 등장한다. 정재일 ‘오징어게임’ 음악감독이 “길고도 유기적이지만 지루할 틈 없는 스코어링을 위해” 그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전 회에 걸쳐 가장 많이 울려 퍼지는 테마이자 분홍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진행요원들이 등장할 때 흐르는 ‘핑크 솔저스(Pink Soldiers)’가 23의 작품이다. 23의 또 다른 작품인 ‘호스티지 크라이시스(Hostage Crisis)’ ‘딜리버리’ ‘디어엔드’가 ‘오징어게임’에 삽입됐다.

‘오징어게임’ ‘기생충’ 등의 음악작업을 통해 ‘천재 뮤지션’으로 통하는 정 음악감독은 평소 김 음악감독을 존중해왔다.

김 감독의 작곡가 예명 23은 ‘벌거벗은 점심’으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가 발견한 불운한 숫자 ‘23’의 법칙에서 따왔다. 불길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문제가 모두 본인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초연의 긍정도 담겼다. 김 감독의 음악에도 같은 맥락이 녹아 있다. 작품과 유기적이면서도, 독자적으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최근 강남에서 만난 김 감독은 “‘오징어게임’ OST ‘핑크솔저스’가 흥행했어도 변한 건 없어요. 해오던 것처럼 제 작업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재연 중인 ‘미인’(12월5일까지 뮤지컬 미인 예스24 스테이지)은 중대극장 초연과 다르게 소극장 공연입니다. ‘도어스’, ‘애니멀스’ 등 신중현 선생님이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 밴드의 노래 풍을 매시업(두 가지 이상의 노래를 합친 것) 하셨다고요.

“초연은 극의 배경에 맞춰 1940년대 전후의 빅밴드 음악으로 편곡했었어요. 이번 시즌엔 장소와 극에 그 장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죠. 1960~70년대 록의 전성 시대의 음악들을 장르적으로 섞어 봤습니다. ‘바람’엔 티렉스(T.Rex)의 ‘20세기 센추리 보이(20th Century Boy)’, ‘꽃잎’엔 애니멀스의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1964), ‘간다고 하지마오’엔 서프(Surf) 기타리스트 딕 데일(Dick Dale)의 ‘미실루(Misirlou)’(1962)를 모티브로 삼거나 스타일로 차용했습니다. ‘미련 리프라이즈(rep.)’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형식을 합쳤어요. 앞부분은 다이어 스트레이트의 ‘술탄스 오브 스윙(Sultans of Swing)’(1978)을 모티브로 삼았고, 뒷부분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앞의 비트를 영화 스코어처럼 덮어가는 구조로 작업해 봤습니다.”

-감독님은 평소 주크박스 뮤지컬의 편곡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서사의 완성’을 꼽으셨습니다. ‘미인’에선 그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곡이 마지막 노래인 ‘아름다운 강산’이죠.

“지난 공연에서 ‘아름다운 강산’은 극에 발을 반만 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곡이었어요. 연주곡 형태가 포함돼 있었죠. 이번에는 이야기를 종결시킵니다. 주인공 강호의 변화를 보여주고 희망적인 것을 담고자 했습니다. 저 혼자만의 해석이지만 지난 시즌과 이번 시즌을 ‘루프물’(등장인물이 일정한 시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로 엮였다고 생각했어요.”

-주크박스 편곡할 때 원작자에 대한 존중심이 느껴집니다.

“사실 기존 노래를 재해석하는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와도 응하지 않아요. 편곡도 작곡의 일부라고 생각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거든요. 지난 시즌 ‘미인’에선 극의 모든 전환 음악이 다음에 나올 음악이었죠. 음악감독은 미리 대본을 해석하고 나름대로 음악적 연출을 해놓은 뒤에 연습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심을 잃게 되거든요. 원곡자에 대한 헌정과 파격적인 절제가 중요해요. 아울러 극장은 사운드적으로도 관객에게 다른 경험을 안겨드려야 하죠. 입체 음향 등이 예입니다. ‘미인’ 같은 경우도 믹싱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최근 막을 내린 뮤지컬 ‘아일랜더’에도 참여하셨죠. 배우들이 직접 루프 스테이션(목소리나 연주를 즉석에서 녹음해 실시간으로 반복 재생하는 기계)을 사용하면서 악기 없이도 다양한 멜로디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일랜더’는 순환에 대한 이야기인데, 역시 순환 구조인 루프 스테이션이라는 악기 자체와 잘 맞았어요. ‘아일랜더’가 우란문화재단 작품인데, 제가 좋아하는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베르나르다 알바’를 함께 작업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아일랜더’의 경우에도 배우들로부터 제가 많이 배웠죠.”

-‘오징어게임’에 삽입된 ‘핑크 솔저스’는 어떻게 작업하신 곡입니까?

“원래 제가 만들어놓았던 곡이에요. 사실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에서 사용하려고 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던 곡이죠. 작곡가로서 외면당한 곡인데 정재일 음악감독님이 좋은 기회를 준 거죠. 의도치 않게 제게 용기를 준 거예요. 음악을 만들 때 장면을 생각하면서 만들지만 항상 제가 옳은 건 아니에요. 연출 의도와 잘 맞아 떨어져야죠. 자존감이 떨어져 있었는데, 신기하게 ‘오징어게임’ 극 중 장면과 신기하게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아이튠즈 월드와이드 차트에서 60위까지 올라갔더라고요. 유튜브 구독자가 2500만명가량이 되는 유명 남미 DJ가 협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신기하고 재밌는 상황이죠. 하지만 제 작업에 바뀐 건 없어요. 해오던 대로 하던 걸 해나가고 있죠.”

-내년이면 뮤지컬 데뷔 20주년입니다. 계획이 있나요? 안타깝게 지난해 열려고 하셨던 콘서트가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되기도 했는데요.

“이제 제 작곡 작업에 집중하고 싶어요. 편곡 작업은 크루를 만들어 플랫폼을 통해 하고 싶습니다. 저만의 전환 작업이 필요할 때인데요. ‘오징어게임’도 그렇고 제가 계속 배우는 과정들이 있었으면 해요. 그건 제가 맞게 해나가고 있다는 확인 과정이자, 여러 사람과 소통을 해나가는 과정이죠.”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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