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감독 변성현, 이하 ‘불한당’)는 배우 설경구에게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영화다. “선배님을 빳빳하게 펴고 싶다”는 변성현 감독의 말을 믿고 영화에 출연한 그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범죄조직 2인자 한재호를 통해 뜻밖의 섹시한 매력을 발산했고,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두루 좋은 평을 얻었다. 영화 속 한재호와 조현수에 열광하던 팬들은 ‘불한당원’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약 5년이 흐른 지금도 ‘불한당 팀’의 서포터를 자처하고 있다.
이달 26일 개봉한 ‘킹메이커’는 ‘불한당’ 변성현 감독과 제작진, 설경구가 모여 완성한 또 한 편의 영화다. 범죄 스릴러였던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는 근현대사 속 실존 인물들의 관계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선거 캠프 참모였던 엄창록의 이야기를 담아낸 ‘킹메이커’에서 설경구는 김대중 대통령을 모델로 한 정치인 김운범을 연기했다.
“연기를 해내기에 재밌는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일단 4, 5번 정도의 연설 장면에 대한 부담이 컸어요. 제 성격이 남들 앞에서 막 얘기하고 설득시키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스트레스가 컸죠. 그런데 감독님이 연설문 신이 정말 중요하다고 얘기를 해서 두 달 전부터 스트레스가 왔었죠.”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토로한 것이 무색하게도 ‘킹메이커’ 속 설경구의 연설 장면은 정치인 김운범의 소신과 철학, 인간미와 재치 등을 두루 담아내고 있다. 실존 인물을 모사하는 것이 아님에도 설경구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김 전 대통령의 성품이나 매력이 오롯이 드러나 있어 자연스레 그를 떠올리게 된다.
“재미를 느끼면서 찍지 않았어요. 신이 나서 했던 캐릭터는 아니었죠. 내 주장을 펼치는 대선주자인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김운범은 참모들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지 자기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는 캐릭터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리액션이 더 많은 캐릭터죠. 혼자하는 게 많고요. 영화를 찍으면서 대선 후보들이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김운범은 참 외로웠던 캐릭터였어요.”
‘킹메이커’의 시나리오는 ‘불한당’을 찍을 때 받았다. 설경구는 “딱히 직접적으로 같이 하자는 말을 안 했는데 어느덧 ‘불한당’ 개봉하고 1년 후에 하게 돼 있더라”라고 말해 웃음을 줬다. 변성현 감독으로부터 처음 제안을 받은 캐릭터는 김대중이었다. 처음 캐릭터를 제안 받은 그는 부담감을 비롯한 여러 복잡한 감정을 느꼈던 듯 했다.
“돌아가신 DJ가 모티브가 된 인물이고, 처음 캐릭터 이름도 김대중이었어요. 그래서 중압감이 심해 감독님께 실명을 쓰지 말고 이름을 바꾸자고 했어요. 그렇게 얘기하고 바꿔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서 부담이 많이 됐어요.”
심지어 설경구는 변 감독에게 김대중 역할이 아닌, 이선균이 연기한 엄창록 역할(극 중 서창대)을 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정말 이 역할을 안 하고 싶었어요. 배우로서 크게 할 역할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상에서 (김운범은) 자리를 지키는 인물이라 입체적으로 와닿지 않았죠. 그래서 변성현 감독이 다른 분을 추천하고 내가 서창대 하면 안 되느냐, ‘불한당’을 찍으면서 몇 번 얘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변성현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설경구는 “어떤 방법으로 말해도 변 감독이 흔들리지 않더라, 나를 김운범이라고 찍어놓고 생각한 것 같다, 꿈쩍하지 않더라”라고 회상했다. 이후 변 감독은 이에 대해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김운범은 욕망이 드러난다거나 숨겨진 이면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자칫 평면적여 보일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입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배우가 손에 꼽힌다고 생각한다, 설경구 선배님은 그 중에 한 분이었다”며 “(설)경구 선배님이 연기하시는 서창대도 궁금하다, 그런데 그러면 김운범의 나이가 높아지는데 나는 젊은 정치인 김운범을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 부담이 큰 상태에서 촬영을 했었고 지금도 (관객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이 있어요. 저희가 유료 시사회를 한 번 했는데 그때 김홍업 이사장님이 가족 분들과 오셨어요. 그때 어떻게 보실지 걱정이 돼서 그분들의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고요. 그래서 고개를 이렇게 푹 숙이고 있었어요. 다행히 잘 보고 가셨다 해서 조금 안심했습니다. 저에게 정말 어려운 인물이었어요.”
‘킹메이커’에서 설경구는 후배 배우 이선균과 호흡을 맞췄다. ‘킹메이커’는 사실상 킹메이커인 서창대의 감정선대로 흘러가는 영화다. 서창대가 정치인 김운범을 바라보며 느끼는 존경심과 희망, 열등감, 애정과 증오 등을 따라가다 보면 멜로 못지 않게 진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서창대의 캐릭터가 그만큼 중요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역할에 이선균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설경구였다.
“‘자산어보’도 그렇고 툭 생각나는 사람을 던져요. ‘자산어보’도 변요한씨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둘이 친분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변요한 어때요?’ 했었어요. 이번에도 그랬어요. 매회 챙겨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TV를 틀면 보게 되는 드라마가 ‘나의 아저씨’였어요. 드라마를 보다가 변 감독님에게 ‘이선균 어때?’ 하고 물어본 거였죠.”
인연 혹은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아저씨’에는 두 주인공이 설경구 주연의 영화 ‘박하사탕’을 보는 장면이 나오고, 이선균은 제작보고회에서 영화 속 극장 장면에 대해 언급해 한 차례 놀라움을 준 바 있다. 그리고 이날 인터뷰에서 설경구는 “그날 거기에 덧붙여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지어낸 얘기 같을까봐 안 했다, 사실 나도 우연히 TV를 틀어서 그 극장 장면을 봤다, 그것도 인연이면 인연이다”라고 말하며 캐스팅에 얽힌 특별한 사연을 밝혔다.
지난해 설경구는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의 정약전 캐릭터로 국내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였다. 2017년 ‘불한당’으로 수상한 이후 약4년만에 또 한 번 받는 큰 관심이었다.
“영화를 했던 초반에 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영화를 하면 늘 이렇게 받는구나, 영화를 하면 해외영화제를 이렇게 많이 나가는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어요.(웃음) 당시 해외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많이 갔는데 너무 힘들어 안 간 영화제도 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러다 십 몇 년 뚝 끊꼈어요. 그러다가 ‘불한당’ 때 다시 해외영화제에 가고 상을 받았죠. 그리고 작년에 감사하게도 ‘자산어보’로도 많은 상을 받았고요. 어릴 때는 상을 멋모르고 받았다면 지금은 더 떨리고 신인상 받는 느낌으로 받게 돼요. 너무 감사했어요. 상은 기대하면 안 오고 편안하게 상황을 즐기면 보너스처럼 오는 것 같아요.”
‘킹메이커’는 지난해 12월 개봉을 준비했다 코로나19 상황 악화로 한 차례 개봉을 늦춘 끝에 지난 26일 개봉했고, 설 연휴 흥행을 기대 중이다.
“저 답지 않게 12월 한 달 내내 홍보를 참 많이 했어요. ‘방구석 1열’부터 해서 많이 나갔는데 코로나19로 인해서 개봉이 한 달 정도 미뤄지면서 조금 붕 뜬 상태였고, 지금은 이선균씨도 저도 감독님도 어리둥절해 하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에요…거창한 목적의식 없이 평범한 한 개인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감독님은 김운범을 큰 사람으로 그리고자 했다는데 저는 오히려 개인 김운범에 집중했어요. 큰 인물일 수 있으나 한 인간이었다, 이런 부분이 참 재밌습니다. 많이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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