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에스더는 남편 홍혜걸과 함께 25일 오후 방송된 MBN ‘신과 한판’에 출연, 어린 시절 대구에서 대궐 같은 집에서 부유하게 살았던 과거를 밝히며 “우리 할아버님은 정계쪽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가까워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대구에 오시면 항상 우리 집 마당에 오셨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러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민당 후보로 대구에 유세를 오셨다, 그때 TK는 김대중 대통령의 선전물을 어떤 언론사도 찍어주지 않았다”며 “우리 아버지가 대구일보의 기획실장이었다, 할아버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해 절대 못하는데 아버지는 반골 기질이 있어서 전부 인쇄물을 안 찍어준다고 하니까 밤새 친구들과 윤전기를 돌린거다, 수성천에 유세 나오면서 대구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전물이 쫙 깔리니까 안기부의 전신 중앙정보부에서 바로 아버지를 잡아갔다”고 밝혔다.
이후 여에스더의 할아버지는 청와대를 찾았지만 너무 화가 난 박 전 대통령이 방문을 받지 않아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여에스더는 “할아버지가 가진 모든 사업체가 하나 빼고 자산공사로 넘어가고,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너희는 한국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는 할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실 때 국내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로 인해 부모님과 여에스더를 포함한 자매들은 70년대 일본에서 3년간 생활을 해야했다. 여에스더는 “여덟 살이다, 1972년 봄이니까 초등학교 1학년 끝날 무렵이었다, 72년도 초에 저희 신문사가 폐간될 무렵, 신문사가 폐간을 하니까 기자들이 저희 집 마당에 수십명이 와서 퇴직금을 달라고 데모를 하는데 그 노래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퇴직금 달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돈, 돈, 돈 내놔’ 하는 노래였다”고 회상했다.
일본 생활은 부유했던 한국 생활과 달리 단촐했지만 자매들에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여에스더는 “800평 대궐에 살다가, 엄청나게 조그만한 맨션으로 갔다, 방이 두개가 있고 거실이 있다, 거실 하나에 이불을 펴놓으니까 가득차더라”며 “딸들은 방 하나에 2층 침대를 두고 (한 칸에 두 명씩) 네 명이 살았다, 하지만 저나 언니들은 워낙 한국에서 복잡한 환경에서 살다가 일본에서는 온전히 저희 식구만 살았다, 그 3년이 저희한테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다, 집안에 시끄러운 일도 없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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