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의 실록한의학]정조의 갱년기 증상 다스린 ‘가미소요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6일 03시 00분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어린 나이에 부모의 죽음을 지켜본 자녀는 건강하게 살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다. 10세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죽음을 지켜본 정조(1752∼1800)는 한창 나이인 48세에 생을 마감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사건을 목도한 후 평생 화증(火症)을 앓았다고 한다. 평생 그를 괴롭힌 트라우마와 이를 이겨 내려는 초인적 자기 절제는 그를 더욱 병들게 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몸에 불을 붙였다.

정조는 죽기 13일 전인 1800년 6월 15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래와 같은 병세를 호소했다.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 더욱 심해져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항상 얼음물을 마시고 차가운 온돌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정조가 말한 위로 오르는 열감과 불면증, 불안 등은 보통 여성의 갱년기 증상과 일치한다. 정조를 평생 진료했던 주치의 수의(首醫) 강명길은 ‘가미소요산’이란 처방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얻는다.

한의학적 치료의 핵심은 몸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열이 나면 일단 열을 내리는 데 치중한다. 문제는 열이 내려가면서 온기(溫氣)가 지배하는 소화력까지 떨어진다는 점. 강명길은 이 점에 주목했다. 열을 내리면서도 식욕을 돋우고 기력을 회복시키는 복합 처방을 정조에게 쓴 것이다. 가미소요산의 소요는 중국 고전 ‘장자 소요유편’에서 비롯된 말이다. 소요산을 복용하면 ‘큰 물고기가 대붕이 돼 우주에서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듯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의미다.

이 처방은 심장부와 손·발바닥의 열감, 가슴이 두근거림, 볼이 붉어짐, 입과 목이 마름, 열이 났다 추워지는 증상에 주효했다. 갱년기 증상에 이 약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미소요산에 들어가는 당귀와 작약은 혈(血)을 보충하고 혈행(血行)을 촉진한다. 백출과 복령은 위장을 튼튼하게 한다. 시호는 가슴에 오르는 열을 내리며 긴장을 해소하며 치자와 목단피는 갱년기 허열(虛熱)을 제거하는 작용을 한다. 요즘 건강보험 약품 가격으로 몇 천 원에 불과한 이 약이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가 가장 사랑한 약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정조#갱년기#가미소요산#강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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