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의 실록한의학]선조의 병이 ‘여색’ 때문? 율곡의 실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2일 03시 00분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조선의 왕들은 단명했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원인에 대한 신하들의 구체적 언급을 찾긴 힘들다. 그 대신 돌려서 말한 부분은 접할 수 있다. 인조 17년 신하들은 인조의 병을 귀신 들린 병인 ‘사수(邪수)’로 진단한 침의들을 ‘촌의(村醫)’, 즉 능력 없는 시골의사라고 조롱한 뒤 왕의 실제 질병 원인을 “기욕(嗜慾)을 절제하지 못한 것”에서 찾았다.

기욕은 식욕과 성욕을 아우르는 말로, 인조가 평소 음식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음을 감안하면 병의 원인은 명확해진다.

선조 또한 ‘여색’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선조 6년 기록을 보면 ‘임금의 목소리가 비정상적인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오래 끌고 낫지 않으니 신하들이 매우 걱정한다’고 썼다. 이후 임금의 목소리 병에 대한 우려가 신하들 사이에 계속되지만 그 원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직언을 올리는 한 신하가 있었으니, 바로 율곡 이이였다.

“목소리가 통리(通利)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라는 신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시니 성의(聖意)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맑지 못한 목소리의 원인이 여색을 삼가지 않은 때문이라고 책망한 셈. 실록은 이런 율곡의 성격에 대해 “쾌직(快直)하다”고 표현했는데, 거침없고 직설적이라는 뜻이다. 이에 선조는 언짢은 심기를 그대로 노출하며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에도 그렇게 말했으나 사람의 말소리가 원래 다 다르고, 내 말소리가 본디 이러한데 무슨 의심할 게 있나”라고 응대한다.

실제 목소리는 성호르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지면 목소리는 굵어지고 저음이 되며 여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면 목소리는 고음이 되고 가늘어진다. 율곡이 임금의 목소리 이상의 원인을 여색과 연관시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율곡의 분석은 여색은 무조건 멀리해야 한다는 유학적 관념론에 치우친 경향이 강하다. 대신 선조가 받은 스트레스 측면을 간과한 것. 선조는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즉위 때부터 유학 공부와 정치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오랜 스트레스는 외향적인 사람의 경우 교감신경을, 내향적인 경우 부교감신경을 흥분시킨다. 부교감신경이 항진되면 미주신경이 과하게 긴장되고 이로 인해 발성에 장애가 온다. 쉰 목소리가 나고 위장운동에 장애가 생긴다.

실록은 선조가 목소리 이상을 호소한 뒤 위장 장애와 소화불량 증상을 지속적으로 호소했다고 기록했다. 율곡을 비롯한 신하들이 한의학의 이론적 부분에만 매달려 정치적 스트레스를 유발한 자신들의 책임은 망각한 것이다. 결국 선조의 병은 악화됐다. 복통, 소화불량, 이명과 어지럼 등의 병이 연이어 발생하자 선조는 임금 노릇에 신물을 냈다. 질병은 삶의 결과물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듯, 한 인간의 삶을 이해해야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의사가 환자의 하소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조의 병#율곡 이이#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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